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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 - 나무위키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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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아프리카 수교국 현황4. 결과 및 의의5. 기타

1. 개요[편집]

1948년 대한민국 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립 이후 아프리카를 상대로 벌인 대한민국북한 간의 외교전.

2. 내용[편집]

1950년대 후반부터 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독립국으로 지위가 바뀌기 시작해 1960년대가 돼서야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립했다. 그런데 아프리카 국가들의 대부분이 서방 국가인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에 의해 과거 식민지배를 받았다 보니 당연히 서구 열강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반면 소련, 동구권공산권은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보니 자연히 식민지 시절부터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소련과 중국공산당, 쿠바 공산당에 우호적이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로 인해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의 대부분은 제3세계에 속하거나 사회주의권에 기울었다. 한국도 당시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하였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의 공산권에 치우친 행보로 수교까지 성사되지 못한 사례가 많았다. 아프리카 국가들과 북한이 당시 관계가 좋았던 이유도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 대한 반서구열강, 반제국주의 성향을 공통적으로 내세운 점에서 찾을 수 있으며 북한도 아프리카의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 지원하는 것은 물론 사회주의 성향의 독재자 지원도 해 주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친서방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이 아프리카 외교에서 북한보다 고전했던 적이 많았다. 그나마 한국과 친했던 국가는 가봉,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 전의 에티오피아 제국 정도였다. 게다가 에티오피아는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가 직접 자국군을 파병한 6.25 전쟁 참전국으로서 최우선 수교 대상국이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빨리 관계가 발전하였고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가 방한할 정도였다. 하지만 1975년 사회주의 성향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에티오피아 역시 반서방 사회주의 국가로 바뀌어 버리자 한국은 에티오피아와 공식적으로는 국교단절까지 안 갔지만 사실상 단교나 다름없을 정도로 관계가 멀어졌다. 특히 1980년대에는 남북한 외교전의 상황을 악용하여 수입을 강매당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다. 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6.25 전쟁 당시 전투병 파병국인데다 좌익과 거리를 두는 정권의 성향상 남한과 관계가 좋을 법도 했지만 이쪽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국제적 평판이 대단히 나빴기 때문에 대한민국도 이런 분위기에서 혼자 수교에 나서는 게 어려웠다.

가봉 같은 경우는 북한과 외교 경쟁에서 자주 충돌이 있었던 국가 중 하나였다. 수교는 북한보다 빠른 1962년에 맺었다. 가봉은 제3세계 국가들 중 하나였지만 프랑스의 영향으로 친서방 외교도 중시했기 때문에 대한민국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197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오마르 봉고 대통령 방한을 성사시키는 등 극진히 대접하고 한국 자본도 가봉에 진출하는 등 상당히 공을 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 집권 초기 북한 애국가를 틀어 버려서 관계가 멀어질 뻔한 적이 있다.

1980년대 들어 1988 서울 올림픽 유치 당시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울의 올림픽 유치를 지지했다는 것을 알고 전두환 대통령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프리카 순방을 준비하던 중에 미얀마에서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터져 해외순방 자체가 중단된 일이 있었다. 테러 자체는 비극이었지만 아무튼 이 테러 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국제적 평판이 급속히 나빠져 이 때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도 북한과 단교하면서 남북한의 아프리카 외교의 무게추가 역전되는 계기가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프리카 국가들과 수교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88올림픽 이후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북방정책이라고 불리는 공산권에 대한 외교전략의 결과로 많은 아프리카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는 결실을 이루었다.

3. 아프리카 수교국 현황[편집]

2021년 외교부 자료 기준으로 대한민국은 아프리카의 48개국과 수교했으며 북한은 46개국과 수교했다. 거의 대부분 남북한 모두와 수교했고 2개 나라는 남한과만 수교했다. 대한민국 외교부가 인지하는 북한 단독 수교국은 없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로 승인하지 않은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서사하라)는 북한이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 남북한 동시 수교국 (46)

4. 결과 및 의의[편집]

1981년에 남한이 서울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고 북한에서 올림픽 보이콧을 시도했으나 이미 국력이 심각하게 남한 쪽으로 기울어서 아프리카 국가에 북한이 제공할 카드가 남한과의 무역과 외교 이익보다 형편없이 적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고 동구권 외교는 1988년 남한이 헝가리와 수교하자 김일성이 큰 충격을 받아 "조선 외교의 후방이 유린당했다"고 두 손을 들 정도였다.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줄줄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수교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북한 외무성은 수 년 동안 초상집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반면 북한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불량국가 이미지가 형성되어 기존의 우방국에서조차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으며[3] 이후에는 고난의 행군이 닥쳐 아프리카에 거의 손을 놓으면서 일방적인 남한의 승리로 끝났다. 초창기에는 오랫동안 지켜온 반제국주의 명분으로 북한을 지지하던 아프리카 국가들도 많았으나 1980년대 들어 북한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아프리카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과거의 흔적은 있어서 아직도 모잠비크, 탄자니아 등지에 가면 북한이 지어 준 경기장이나 거리, 기념비 등이 존재한다. 전반적으로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남한의 경제지원은 물론 군사협력도 강화하기 시작해 친한 쪽으로 돌아선 지 오래다. [4]

특이하게도 보츠와나북한의 인권 문제를 들어서 단교하기도 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보츠와나와 남한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5. 기타[편집]

  • 2021년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에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의 일부가 묘사된다. 남한 외교관들과 북한 외교관들이 UN 가입을 위해 온갖 수를 써서 소말리아의 지지를 얻으려는 모습이 나온다. 다만 영화의 배경인 노태우 정부 시절 이전인 1982년에 아시안 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북한의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동구권 남한 수교 저지와 올림픽 보이콧 시도가 아작나면서 남한의 KO승으로 끝났다. 영화에서는 연출 문제상 마치 남북한이 아직 비슷한 수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사실과 매우 다르다. 이미 1970년대부터 남북한은 경제력을 비롯한 국력 차이가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 탈북 외교관 고영환이 북한 측에서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다.

[1] 2014년 2월 19일 단교[2] 대한민국 외교부는 북한이 에스와티니와 수교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다만 북한은 2007년 9월 20일 에스와티니(당시 스와질란드)와 수교를 했다고 주장했으며 동년 9월 22일에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2018년 11월에는 양국 총리 사이에 전문이 오간 기록도 있다.[3] 적국 수장을 죽이겠다고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들 중 한 명의 무덤을 폭탄으로 망가뜨렸으니, 미얀마인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말 그대로 바닥을 찍었으며, 이는 곧 단교로 이어졌다.[4] 이와 비슷하게 중립을 유지하다 북한 쪽에 불리하게 돌아간 케이스로 한국 전쟁의 휴전 관련하여 만들어진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있는데, 한국/미국/UN 쪽에서 선택한 스위스스웨덴, 북한/중국/소련 쪽에서 선택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냉전 종식 이후 현재 일단은 중립국임을 표방하나 북한의 행동을 지지하지 못하고 친한으로 돌아선 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의외로 소련에게 시달렸던 폴란드와 체코 쪽이 더더욱 냉전 종식 이후 반러 감정과 더불어 친한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 독특한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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