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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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포커사에서 제작한 소형 쌍발 제트 여객기에 대한 내용은 포커 100 문서 참고하십시오.
North American F-100 Super Sabre |
F-100은 슈퍼 항공기였다. 1,150 시간 동안 이 항공기를 비행하면서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항공기로 비행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 F-100 조종사 돈 슈멘크
미국 노스 아메리칸에서 제작된 초음속 제트전투기/전폭기로 미 공군에서 1954년부터 1971년까지 운용했다. (주방위군에서는 1979년까지 운용.). 형식번호에서 알 수 있다시피 센츄리 시리즈
North American F-100 Super Sabre | |
승무원 | 1명(와일드 위즐형 2명) |
길이 | 50피트 (14.95 미터) |
날개 폭 | 38피트 9인치 (11.81 미터) |
날개면적 | 400제곱피트 (37제곱미터) |
공허중량 | 21,000파운드 (9,500Kg) |
전비중량 | 28,847파운드 (13,085Kg) |
엔진 | 프랫 & 휘트니 J57 터보제트 엔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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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속도 | 750kts(863mph, 1,389km/h, 마하 1.134) |
항속거리 | 1,733NM (1,995mile, 3,210km) |
최대도달고도 | 50,000피트 (15,000미터) |
상승속도 | 22,400ft/min (114m/s) |
추력/중량비 | 0.55 |
양력/항력비 | 13.9 |
무장 | 20 mm Pontiac M39A1 리볼버 기총 4문 기본 장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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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전자장비 | *Minneapolis-Honeywell MB-3 오토파일럿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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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부터 미 공군의 제안으로 F-86 세이버의 후속기를 개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초개같은 개발시간을 가졌던 머스탱과 달리 1951년 1월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11월 말이 되어서야 목업이 나왔는데, 이건 이전 것들과는 달리 조금 덜 떨어진다. 어쨌든 초기에는 미 공군도 별로 다른 대안이 없었던 지라 프로토타입을 270대 가량 주문했다.
프로토타입 YF-100A는 양산형보다 성능이 낮은 XJ57-P-7 엔진을 달고도 마하 1.05에 도달하는 등 나름 괜찮은 성능을 보였으며, 초도 양산형 F-100A형이 53년도 10월에 생산되기 시작했으나, 비행성능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도입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고속 제트엔진 전투기는 새로운 기술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나 설계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특정 비행조건에서 발생하는 관성 커플링(inertia coupling) 현상과 그로 인한 요(Yaw, 수직회전축) 불안정성이었다. 초창기 제트전투기들은 긴 원통형의 무거운 기체에 비해 날개가 작고 가벼워 피치, 요 관성에 비해 롤 관성이 크게 낮은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속에서 빠른 롤링을 길게 하면 갑작스럽게 요와 피치 움직임이 증폭되며 기체가 급격한 공기역학적 부하를 받아 공중분해되는 문제였다. 롤 레이트가 기체의 피치나 요 고유진동수와 일치하면서 양성 피드백으로 요+롤 모멘트의 진동이 발산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기체 개발 과정에서는 파일럿이 생환해야 문제를 확인하고 해결할 수 있었으나 고속으로 시험비행중 사고가 발생하면 파일럿이 사망하니 더더욱 해결하기 힘들었다. 척 예거가 이를 경험하고 살아돌아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전달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했다. 주된 해결법은 수직미익을 대형화하여 요 안정성을 확보하고 롤링 속도, 지속시간을 제한하는 방법, 받음각이 높으면[피치] 롤링을 제한하는 방법 등이 있다.
또 한 가지 대표적인 문제는 날개 후퇴각때문에 생기는 "세이버 댄스"였다. 낮은 속도와 높은 받음각(피치)에서 기수가 급격하게 스스로 들리는 현상(violent pitch-up)이었다. 이 현상은 주로 착륙시 발생했고[2] 조종사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상하좌우로 기체를 움직이며 애쓰는 모습을 외부에서 보면 마치 비행기가 춤추는 것 같다고 하여 세이버 댄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1956년 1월 10일의 사고 장면. 우연히 고화질로 기록되면서 세이버 댄스 문제가 유명해졌고, 영화 장면으로 삽입되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조종사 교육에 사용되는 유명한 영상이 되었다.
이 영상의 기체를 운행했던 바티 브룩스는 ROTC 임관 후 1954년부터 대구 공군기지에서 F-86 조종사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와 F-100으로 전환해 비행 40시간만에 위의 사고가 발생했다. 랜딩기어 문제로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비상착륙을 시도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다른 비행 테스트를 위해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어서 고화질로 기록이 된 것이다. 영상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이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음속에 가까운 속도에서 항력이 너무 커지는 직선익 대신 후퇴익이 새롭게 개발되어 도입되고 있었다. 그런데 후퇴익에서는 날개의 끝부분부터 먼저 스톨이 발생, 양력이 상실된다. 그래서 착륙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고 기수를 올리면 날개 끝부분이 양력에 기여를 못하기 시작하여 날개의 중간, 안쪽부분만 양력을 발생시킨다. 그러면 후퇴익에서는 날개에서 양력이 발생하는 위치가 점점 앞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기체의 무게중심보다 양력 발생위치가 앞쪽으로 이동하므로 기수가 들리게 되는 것이다. 기수가 들리면 더욱 받음각이 커져 스톨이 발생하는 범위가 더 안쪽으로 넓어지고, 그럴수록 양력 발생위치가 더욱 앞으로 이동하는 양성 피드백으로 기수가 더욱 들리게 된다. 특히 위 영상에서는 랜딩기어가 고장난 상태였기 때문에 속도를 평소보다 더 줄인 상태로 착륙을 시도하면서 문제가 더 심하게 나타난 것이다.
현대의 전투기들은 추력대 중량비가 1이 넘어 날개의 양력 없이 엔진 출력만으로도 비행할 수 있으므로 이런 상황에선 엔진을 최대출력으로 올려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F-100의 엔진은 최대출력에서도 기체 공허중량의 75%에 불과해 이것도 불가능했다. 기체가 공중에 떠있는 것을 겨우 유지할 수준이라 되려 춤추는 듯한 모습을 만들게 되었고, 착륙 직전에 발생하니 대처할 시간과 공간도 없어 대부분 사망사고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동시대에 개발되던 F-84 또한 지연됨에 따라 전폭기로써 도입되게 되며, 후속작 F-107 울트라 세이버로 이어질뻔 하지만 F-105 덕분에 뒤엎어졌다.[3]
1956년 1월 10일의 사고 장면. 우연히 고화질로 기록되면서 세이버 댄스 문제가 유명해졌고, 영화 장면으로 삽입되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조종사 교육에 사용되는 유명한 영상이 되었다.
이 영상의 기체를 운행했던 바티 브룩스는 ROTC 임관 후 1954년부터 대구 공군기지에서 F-86 조종사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와 F-100으로 전환해 비행 40시간만에 위의 사고가 발생했다. 랜딩기어 문제로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비상착륙을 시도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다른 비행 테스트를 위해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어서 고화질로 기록이 된 것이다. 영상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이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음속에 가까운 속도에서 항력이 너무 커지는 직선익 대신 후퇴익이 새롭게 개발되어 도입되고 있었다. 그런데 후퇴익에서는 날개의 끝부분부터 먼저 스톨이 발생, 양력이 상실된다. 그래서 착륙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고 기수를 올리면 날개 끝부분이 양력에 기여를 못하기 시작하여 날개의 중간, 안쪽부분만 양력을 발생시킨다. 그러면 후퇴익에서는 날개에서 양력이 발생하는 위치가 점점 앞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기체의 무게중심보다 양력 발생위치가 앞쪽으로 이동하므로 기수가 들리게 되는 것이다. 기수가 들리면 더욱 받음각이 커져 스톨이 발생하는 범위가 더 안쪽으로 넓어지고, 그럴수록 양력 발생위치가 더욱 앞으로 이동하는 양성 피드백으로 기수가 더욱 들리게 된다. 특히 위 영상에서는 랜딩기어가 고장난 상태였기 때문에 속도를 평소보다 더 줄인 상태로 착륙을 시도하면서 문제가 더 심하게 나타난 것이다.
현대의 전투기들은 추력대 중량비가 1이 넘어 날개의 양력 없이 엔진 출력만으로도 비행할 수 있으므로 이런 상황에선 엔진을 최대출력으로 올려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F-100의 엔진은 최대출력에서도 기체 공허중량의 75%에 불과해 이것도 불가능했다. 기체가 공중에 떠있는 것을 겨우 유지할 수준이라 되려 춤추는 듯한 모습을 만들게 되었고, 착륙 직전에 발생하니 대처할 시간과 공간도 없어 대부분 사망사고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동시대에 개발되던 F-84 또한 지연됨에 따라 전폭기로써 도입되게 되며, 후속작 F-107 울트라 세이버로 이어질뻔 하지만 F-105 덕분에 뒤엎어졌다.[3]
미 공군에서 본격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4년 9월부터였다. 그러나 초창기 F-100A의 경우, 위에 설명한 개념 없는 스톨 현상이 자주 발생하여 운용에 애로사항을 겪다가 1955년 7월부터 엔진을 J57-P-21로 개량한 C형을 도입했다. 한편 A형은 그래도 계속 쓰이다가 1958년부터 도태시키기 시작하여 1961년에 완전히 퇴역시켰다. 이 때만 해도 47대나 비전투 손실을 봤다고 한다. 그러나, 때마침 베를린 장벽의 건설을 비롯한 냉전 체제가 확립되고 긴장이 강화됨에 따라 다시 1962년부터 도입하여 1970년대에 완전히 퇴역시켰다. C형의 경우 엔진을 개량했지만 아직도 세이버 댄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나, 늘어난 최고속도 덕에 핵 폭탄 폭격[4]용으로 개조된다. 그러나 사고기록은 연일 경신되어 1970년 6월 경에는 85기의 비전투 손실을 기록했다.
이러한 비행 특성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지상 공격에 더 알맞는 플랫폼을 제공하기 위해 D형을 개발하는데, 여기엔 오토파일럿 기능의 도입과, AIM-9 사이드와인더의 운용능력도 추가되었다. 1959년에는 D형의 일부가 AGM-12 Bullpup[5] 운용을 위해 개조되기도 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세이버 댄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을 증가시켰고, 수직 미익을 27%나 크게 만들었다. D형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56년 9월이었다. 그러나 D형도 전기 장치에 문제가 좀 있어서 랜딩 기어나 에어브레이크가 잠기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 D형도 결국 비행특성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아 1967년에 대대적인 개수를 받기 전까지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를 포함, 500대나 사고로 손실된다. 그러나, 1968년에 F-4 팬텀으로 교체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쓰이게 되는데, 이건 그나마 쓸만한 센츄리 시리즈였던 F-105도 여러가지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복좌형 훈련기인 F형도 생산되어 1958년부터 도입되었는데, F형도 1970년까지 74대나 사고로 손실되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이토록 거지같은 비행성능 때문에 고생한 나머지[6], 1972년에 전부 주 방위군으로 돌려지고, 남은 자리는 F-4, A-7, A-10으로 채워졌다. 물론, 주 방위군도 기종교체를 하게 되면서 남은 기체들은 덴마크나 터키 등으로 팔려나가고, 남는 것들은 대만 운용기의 부품공급용으로 해체되거나 무인기로 개조(QF-100)되어 공대공 미사일 실험을 위한 표적기로 쓰였으며,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은 민간에 팔려가기도 했다. 현재는 93기가 현존하며 그중 6기가 여전히 비행할 수 있다.
미 공군에서 운용되는 기간 동안 사고로 유실된 기체 수는 총 889대로, 조종사 324명이 사망했다.[7]
또한, B형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세한 것은 F-100B 문서 참조.
이러한 비행 특성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지상 공격에 더 알맞는 플랫폼을 제공하기 위해 D형을 개발하는데, 여기엔 오토파일럿 기능의 도입과, AIM-9 사이드와인더의 운용능력도 추가되었다. 1959년에는 D형의 일부가 AGM-12 Bullpup[5] 운용을 위해 개조되기도 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세이버 댄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을 증가시켰고, 수직 미익을 27%나 크게 만들었다. D형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56년 9월이었다. 그러나 D형도 전기 장치에 문제가 좀 있어서 랜딩 기어나 에어브레이크가 잠기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 D형도 결국 비행특성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아 1967년에 대대적인 개수를 받기 전까지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를 포함, 500대나 사고로 손실된다. 그러나, 1968년에 F-4 팬텀으로 교체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쓰이게 되는데, 이건 그나마 쓸만한 센츄리 시리즈였던 F-105도 여러가지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복좌형 훈련기인 F형도 생산되어 1958년부터 도입되었는데, F형도 1970년까지 74대나 사고로 손실되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이토록 거지같은 비행성능 때문에 고생한 나머지[6], 1972년에 전부 주 방위군으로 돌려지고, 남은 자리는 F-4, A-7, A-10으로 채워졌다. 물론, 주 방위군도 기종교체를 하게 되면서 남은 기체들은 덴마크나 터키 등으로 팔려나가고, 남는 것들은 대만 운용기의 부품공급용으로 해체되거나 무인기로 개조(QF-100)되어 공대공 미사일 실험을 위한 표적기로 쓰였으며,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은 민간에 팔려가기도 했다. 현재는 93기가 현존하며 그중 6기가 여전히 비행할 수 있다.
미 공군에서 운용되는 기간 동안 사고로 유실된 기체 수는 총 889대로, 조종사 324명이 사망했다.[7]
또한, B형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세한 것은 F-100B 문서 참조.
베트남전에도 투입되었는데 의외로 전쟁기간중 가장 오래 운용한 기종이 되었다. 전폭기로 도입되었기 때문에 주로 지상공격만 투입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예상 외로 F-105를 위한 MiG기 사냥, FAC(Forward Air Controller), 와일드 위즐 등으로 매우 다양한 방면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근접지원용으로도 잘 써먹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교적 초반부터 참여했으므로, 베트남전 최초의 제트기 공중전에 참여하여 기총으로 MiG-17을 격추하기도 하는 등, 제법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8] 더 재미있는 것은, 이 기총격추가 베트남 전 최초의 격추로 알려지고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99.5%의 신뢰성으로 임무를 달성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실전에서는 꽤나 활약을 한 셈이다.
F-100은 베트남전이 확전되기 전에 있었던 '1962년 라오스 위기(라오스 내부에서의 좌-우익간 충돌사태)'때 이미 인접 태국에 미 공군 소속으로 파견나갈 정도로 참전시기가 빠른 편이고, 이후 그대로 눌러앉아 라오스 등지에서의 폭격 임무를 담당하다가 베트남전이 터지면서 베트남 현지 기지에 파병되었다. 처음엔 라오스나 북베트남까지도 활동했으나 성능부족 때문에 점차 남베트남 영내로 작전 범위가 한정되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작전투입은 더 많아졌다.
미 공군은 성능이 좀 떨어지는 F-100에게 남베트남 지역에서의 아군 근접항공지원 등 궂은 일을 거의 떠맡기고 F-4 팬텀 등 신형 항공기에게는 주목도가 높지만 더 위험한 북베트남이나 라오스 공역의 임무를 할당했다. 그 결과 F-100의 수요는 폭주했고, 1968년 테트 공세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한반도)가 겹치자 존슨 행정부는 주방위군의 제한적 현역소집을 결정해 주방위군의 F-100 운용대대들을 거의 대부분 차출해 베트남으로 보냈다.
F-100은 주로 남베트남의 수도 인근 '판랑'기지에 집중배치되었고, 수시로 긴급 작전소요에 대응해야 했기에 판랑에서는 정신없이 이착륙하는 F-100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항공기간 격투전이나 대공망이 강한 지역에 대한 정밀 공격은 무리지만, 소총사격 정도가 대부분인 근접항공지원에서 F-100은 매우 성공적인 기종이었다.
물론, 오래된 기종이기에 곧 F-4C와 F-105로 교체되었으나, F-4 팬텀의 경우 기총 문제 때문에 조종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주 방위군 작전 중 손실된 기체는 총 14대로, 미 공군의 작전중 손실 기체수를 제외한 수치이지만 사고로 손실된 것에 비하면 정말로 미미한 수준이다. 물론, 전쟁 중 총 손실 댓수는 242대이다.
F-100은 베트남전이 확전되기 전에 있었던 '1962년 라오스 위기(라오스 내부에서의 좌-우익간 충돌사태)'때 이미 인접 태국에 미 공군 소속으로 파견나갈 정도로 참전시기가 빠른 편이고, 이후 그대로 눌러앉아 라오스 등지에서의 폭격 임무를 담당하다가 베트남전이 터지면서 베트남 현지 기지에 파병되었다. 처음엔 라오스나 북베트남까지도 활동했으나 성능부족 때문에 점차 남베트남 영내로 작전 범위가 한정되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작전투입은 더 많아졌다.
미 공군은 성능이 좀 떨어지는 F-100에게 남베트남 지역에서의 아군 근접항공지원 등 궂은 일을 거의 떠맡기고 F-4 팬텀 등 신형 항공기에게는 주목도가 높지만 더 위험한 북베트남이나 라오스 공역의 임무를 할당했다. 그 결과 F-100의 수요는 폭주했고, 1968년 테트 공세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한반도)가 겹치자 존슨 행정부는 주방위군의 제한적 현역소집을 결정해 주방위군의 F-100 운용대대들을 거의 대부분 차출해 베트남으로 보냈다.
F-100은 주로 남베트남의 수도 인근 '판랑'기지에 집중배치되었고, 수시로 긴급 작전소요에 대응해야 했기에 판랑에서는 정신없이 이착륙하는 F-100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항공기간 격투전이나 대공망이 강한 지역에 대한 정밀 공격은 무리지만, 소총사격 정도가 대부분인 근접항공지원에서 F-100은 매우 성공적인 기종이었다.
물론, 오래된 기종이기에 곧 F-4C와 F-105로 교체되었으나, F-4 팬텀의 경우 기총 문제 때문에 조종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주 방위군 작전 중 손실된 기체는 총 14대로, 미 공군의 작전중 손실 기체수를 제외한 수치이지만 사고로 손실된 것에 비하면 정말로 미미한 수준이다. 물론, 전쟁 중 총 손실 댓수는 242대이다.
F-100은 동 시대에 활약한 해군의 F-8 크루세이더와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는데, 같은 J57 엔진을 하나 장비한 초음속 전투기임에도 불구하고 성능면에서 크게 뒤떨어졌다. 속도기록만 보아도 F-100이 최대 1,390km/h이지만 같은 엔진을 장착한 F-8은 1,975km/h. 베트남전에서의 활약도 F-8이 좀 더 화려하다. F-8이 F-100보다 4년 정도 늦게 나오긴 했지만...
활주로를 없애고 대신에 전투기를 로켓부스터로 쏘아 올리려고 했던 ZELL 프로젝트의 미국내 대상기종이었다. 결국 148대가 부스터 장착형으로 개조되었지만, ZELL 프로젝트 자체의 한계로 결국 실전배치되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독일에서는 이것을 F-104로 하려고 했다.
몇 가지 재미있는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최초 음속 돌파한 미군 전투기라는 것과 함께, 최초로 미군 전투기-전투기간 공중 급유에 성공, 최초로 베트남전에 투입된 미군 전투기 및 최초로 베트남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1964-1968년 기간 동안 미군 곡예 비행대, 썬더버드에서 운용하기도 했다.
활주로를 없애고 대신에 전투기를 로켓부스터로 쏘아 올리려고 했던 ZELL 프로젝트의 미국내 대상기종이었다. 결국 148대가 부스터 장착형으로 개조되었지만, ZELL 프로젝트 자체의 한계로 결국 실전배치되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독일에서는 이것을 F-104로 하려고 했다.
몇 가지 재미있는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최초 음속 돌파한 미군 전투기라는 것과 함께, 최초로 미군 전투기-전투기간 공중 급유에 성공, 최초로 베트남전에 투입된 미군 전투기 및 최초로 베트남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1964-1968년 기간 동안 미군 곡예 비행대, 썬더버드에서 운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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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2] 낮은 속도와 높은 받음각인 조건[3] F-107이 F-105와의 경쟁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4] 폭탄을 투하하는데 보통 급강하나, 수평비행을 하다 떨구는 방식을 사용하지만, 저공으로 날다가 갑자기 상승하면서 떨구는 방식도 있다. 마치 폭탄을 '던지는' 것 같다고 해서 Toss Bombing이라 한다. 이 방식으로 폭격하면 폭탄이 순간적으로 위로 올라갔다 내려가기 때문에 수평 비행 또는 급강하 폭격 방식에 비해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으나, 던지고 바로 이탈할 수 있어 목표물 위를 지나갈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5] 미군 최초의 공대지 유도 미사일. 이 당시에는 어떻게 유도했냐하면, 미사일 꽁무에서 나오는 추진체 불꽃을 보고 발사체 승무원이 직접 조종했다. 이 때문에 승무원이 1명인 F-100 슈퍼 세이버에 오토파일럿 기능이 도입된 것이다.[6] 비행성능도 비행성능이었지만 F-100을 뛰어넘는 후계기들이 속속들이 배치된 것이 컷다. 미 공군에서 공대공 임무는 이미 F-4가 대체했고, 공대지 임무에서도 F-105, F-4와 A-7이 배치되면서 구식 전투기인 F-100을 계속 운용할 이유가 없었다[7] 농담삼아 F-104를 과부제조기라고 하지만 미 공군의 진정한 과부 제조기는 F-100이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한 F-104의 비전투 손실 댓수를 다 합쳐도 미 공군의 F-100 비전투 손실 댓수보다 적다. 이마저도 F-104가 원래 목적에서 어긋나게 운용되었기 때문에 사고율이 높은 것이었다.[8] 이렇게 된 이유는 비교적 낙후된 기종을 사용하는 주방위군을 베트남에 참전시킨 것도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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