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는 왕비와 왕세자빈을 비롯하여, 왕대비나 대왕대비와 같은, 왕실 적통의 여성 배우자들이 착용하는 법복(法服)이다. 관복(冠服), 명복(命服), 또는 예복(禮服)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보서례]에 제시된 왕비와 왕세자빈의 예복제도에 따르면 적의 제도에 규, 수식(首飾), 적의, 하피(霞帔), 상(裳), 대대(大帶), 옥대(玉帶), 패(佩), 수(綬), 폐슬(蔽膝), 말(襪), 석(舃)과 같은 복식류가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면사(面紗)와 별의(別衣), 내의(內衣)가 추가된 기록도 보인다.
적의는 왕비나 왕세자빈의 혼례인 가례(嘉禮) 때 책비의(冊妃儀) 또는 책빈의(冊嬪儀), 그리고 친영의(親迎儀)와 동뢰연(同牢宴) 등에 착용되었다. 그 외에 조하의(朝賀儀)나 궁중연회에도 착용되었으며 제복(祭服)으로, 그리고 흉례(凶禮) 시 대렴의(大斂衣)로도 사용되었다. 왕이 면복이나 원유관복을 입을 때는 물론, 곤룡포를 착용할 때에도 적의를 입는 경우가 있었다.
적의는 왕실 여성의 신분에 따라 색상이 달리 적용되었다. 왕비는 대홍색 적의를 착용하는 반면에, 왕세자빈은 아청색 적의를 착용하였다. 17세기 후기인 숙종대에는 대왕대비의 적의에 자적색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18세기 후기 정조대에는 혜경궁 홍씨의 적의에 천청색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신분에 따라 적의의 색상이 분화되는 특징을 보였다.
적의 제도의 변천
1681숙종가례-재현-왕비-적의-재현
우리나라의 적의 제도는 다섯 단계를 거쳐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고려 말인 공민왕 19년(1370)에 우리나라에 왕비의 적의가 수용된 이후, 1403년 조선 태종 때 명나라의 대삼(大衫) 제도가 수용되기 이전 단계에 사용되었던 적의제도이다.
두 번째 단계는 1403년 이후 수용된 대삼과 하피가 사용되었던 시기의 조선 전기의 적의제도이다. 명나라의 제도로 볼 때, 엄밀히 적의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는 제도였으나 조선에서는 고려 이후에 사용되어 온 적의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새로운 왕이 즉위하였을 때나 명나라에 특별한 경사가 있을 경우, 조선에 왕의 면복과 함께 명나라의 군왕비나 친왕비의 예복에 해당되는 왕비의 대삼을 보냈다.
세 번째 단계는 조선식의 적의 제도가 사용된 17세기에 해당되는 시기에 해당된다. 체발(髢髮)로 제작한 수식(首飾)과 36개의 수원적(繡圓翟)을 부착한 적의를 사용하였다. 네 번째 단계는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서례(國朝續五禮儀序例]에 제시되어 있는 제도로서, 세 번째 단계의 적의제도에서 약간 변형된 제도였다. 51개의 수원적(繡圓翟)을 부착한 적의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1897년 이후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근거하여 황후의 적의제도를 적용한 시기에 해당된다. 1922년 영왕과 영왕비의 조현례 때에 착용하였던 윤황후의 적의와 영왕비의 적의 유물이 남아 있다. 세종대학교박물관(중요민속문화재 제54호)에는 윤황후의 적의가,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영왕비의 적의(중요민속문화재 제225호)가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종이로 만든 황후용 적의본과 폐슬본(중요민속문화재 제67호)이 소장되어 있다.
본 캐스트에서는 고려 말 이후 17세기까지의 조선식 적의제도의 정착 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고려 말 이후 조선 초 적의 제도
송나라 진종후좌상(眞宗后坐像, 眞宗 997-1022 재위) <國立故宮博物院(1971), [故宮圖像選萃]>
[고려사]에 따르면 1370년(공민왕 19, 홍무 3), 명나라 태조의 황후가 고려 왕비의 관복으로 적의를 보냈다. 보낸 왕비의 관복 안에는 관식(冠飾)과 적의, 소사중단(素紗中單), 폐슬(蔽膝), 대대(大帶), 혁대(革帶), 패(珮), 수(綬), 청말(靑襪), 청석(靑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송나라 황실 적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관(冠)은 7휘2봉관(七翬二鳳冠)인데 꽃 모양의 꽂이 9개와 작은 꽃 꽂이 9개가 장식되고 양쪽 아래로 뻗쳐진 박빈(博鬢, 사모의 뿔 형태)이 있었으며 관의 아래쪽 둘레에 장식되는 9개의 장식판[鈿]이 있는 것이었다. 관의 모습은 대략 적의를 입고 있는 송나라 황후들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푸른 색의 화려한 관모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의는 청색 바탕에 꿩을 9단[九等]으로 수놓은 것[繡翟]이며 흰색 중단[素紗中單]은 도끼무늬[黼紋]가 있는 홍색 선장식(緣)을 두른 것이었다. 폐슬은 치마[裳]의 색과 같은데 가장자리는 검붉은 색[緅]을 둘렀고 꿩 수를 2단으로 장식하였다. 그 외에 적의[衣]의 색을 따른 대대(大帶)와 혁대, 금고리가 달린 패(珮), 수(綬), 청말(靑襪)과 청석(靑舃)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 제도는 대한제국 이후 사용한 황실 여성의 적의제도와 유사한 점이 있다.
조선 전기, 명의 대삼 제도에 근거한 적의 제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종 3년(1404)에 원경왕후가 처음으로 명으로부터 관복을 사여받았다. 이후 인조 3년(1625)까지 16차례에 걸친 사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사여된 왕비의 관복은 친왕비나 군왕비의 대삼(大衫) 제도였는데 7적관(七翟冠), 무늬없는 대홍색 대삼(大衫), 꿩 무늬의 청색 배자(褙子), 심청색 하피(霞被)와 삽화금추두(鈒花金墜頭), 상아홀(象牙笏) 등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황후와 황태자비의 상복(常服)이었던 ‘대삼’이 황비 이하의 예복으로 규정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왕비에게 군왕비나 친왕비의 예복 제도를 적용하여 내려진 것이었다. 명으로부터 대삼이 사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조오례의]에 왕비의 예복을 ‘적의’라는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국내에는 이 시기의 적의제도와 관련된 유물이나 도상이 없으나 2001년 중국 남창(南昌)의 영정왕(寧靖王) 부인 오씨(吳氏, 1439-1502) 묘에서 명나라 명부(命婦)의 대삼과 하피가 출토됨에 따라 당시의 제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대삼은 앞이 짧고 뒤가 긴 형태로, 양 옆 진동 아래로부터 긴 트임이 있는 대금형 홑옷인데 등에는 하피를 담을 수 있는 삼각형 두자(兜子)가 붙어 있다. 그리고 하피는 너비 13cm에 길이가 245cm인데 규형(圭形)으로 접어 각 조각에 7개의 꿩무늬[翟紋]와 구름무늬[雲霞]를 수놓았다. 규형으로 된 하피의 끝부분에 금추자(金墜子)를 달아 대삼의 앞길 밑단에 닿도록 하고 나머지 갈라진 두 끝은 좌우 어깨 뒤쪽으로 넘겨 대삼 뒷길에 부착된 삼각형 두자 주머니에 하피 양끝을 각각 담는 방식으로 착용하였다.
명나라 영정왕(寧靖王) 부인 오씨 묘 출토 대삼과 하피, 금추자 趙豊(2002), [織品考古新發現], 香港: 藝紗堂, pp. 176-179.
17세기, 조선식 적의 제도의 시작
인조와 장렬왕후의 [가례도감의궤(1638)]에 왕비의 적의와 하피 등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적의 도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의궤] 기록에 의하면 대홍색 겉감과 안감을 사용한 적의에 운봉흉배(雲鳳胸背)를 달았으며 앞뒤에 36개의 수놓은 원적(圓翟)을 장식하였다. 도상에 어깨와 앞길 양 옆으로 각각 10개가 그려져 있다. 나머지 16개는 뒤에 장식되었을 텐데 뒷면의 도상이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장식 방식은 알 수 없다. 대체로 좌우 옆선, 혹은 좌우 옆선과 밑단 등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궤]에는 원적 도안이 보이는데 꿩무늬라고 기록하면서도 원형 안에는 꿩 대신 봉황이 상하로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17세기 전기 조선의 적의와 하피([인조장렬후 가례도감의궤], 1638년)
한편 1627년 소현세자의 [가례도감의궤]에 세자빈의 적의는 무문아청필단에 남숙초 안감으로 만들고 36개의 쌍봉(雙鳳) 자수 조각이 장식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적의에는 언제부터인지 흉배와 견화 외에 원형의 자수 조각이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상으로는 왕비는 꿩무늬[翟紋]를, 세자빈은 봉황무늬[鳳紋]를 사용하는 차이가 있지만 장렬왕후의 [가례도감의궤]에 그려진 꿩무늬 그림도 봉황처럼 보이는 것을 볼 때 실제적으로는 왕비나 세자빈의 적의에는 같은 무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장렬왕후의 하피에는 적계(翟鷄) 14쌍을 그린다고 하였는데 두 조각을 연결하여 제작하므로 하피 한 조각에 적계문 14개씩을 그린 것이다.
18세기 영조대 이후, 대한제국 시기의 적의 제도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계속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