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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 위대한 화가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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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한 미술계 거장들을 모은 방대한 인물사전! 미술계 거장들에 대한 알기 쉬운 안내서 『501 위대한 화가』. 화가, 조각가, 혼합매체 미술가, 포토몽타주 작가, 설치미술가 등 501명의 미술계 거장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영국의 유명한 저술가이자 미대 교수인 스티븐 파딩이 편집하고 미술 평론가들과 미술사학자들로 구성된 국제적인 팀이 집필하였다. 시대를 거치면서 등장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을 통해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미술의 전반적인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천년 전 중국의 화가 동원에서부터 시작하여 1974년에 이란에서 태어난 미술가 시라나 샤흐바지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501명 모두를 태어난 연대순으로 배치하였고, 각각의 작품들을 생생한 컬러 도판으로 수록했다. 생애와 예술양식을 짤막하게 정리한 후 본론에서 시작되는 일대기는 간결하면서도 그들의 창조적 혁신성과 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평가까지 포함되어 있어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또한 본문 옆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각 미술가들의 대표작과 그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명칭도 친절히 알려준다. 밝게 표시된 인용문은 미술가나 미술 평론가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미술가의 정신세계와 작품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부록으로 용어사전을 실어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 책임편집자 스티븐 파딩 화가

    화가이자 런던 미술대학 드로잉학과의 루스타인 홉킨스 연구 교수이다. 1990년에 옥스퍼드대학 러스킨 드로잉 스쿨의 학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옥스퍼드 세인트 에드문트 홀의 특별회원으로도 임명되었다. 1998년에는 런던 왕립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000년에는 맨해튼 뉴욕 미술아카데미의 총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런던 세인트 마틴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파딩은 런던 왕립예술대학에서 회화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77년부터 현재까지 조형미술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또한 파딩의 작품은 영국과 일본, 남미 등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 옮긴이 박미훈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의 포도주 마시는 여인상 연구」가 있으며, 역서로는 아트북 시리즈 중 『고야』가 있다.

  • 이미지 비피케이 비피케이 로고

  •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짧은 생애였지만 가장 유명한 미술가로 남아있다. 초기 작품은 어두운 색조의 작품이었고, 후기 작품은 표현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고흐의 작품은 20세기 미술운동인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 반 고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가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은 20세기의 미술운동들, 특히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토대를 제공했다.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생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1869년에 그는 프랑스에 본점이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옛 대가들의 작품과 동시대 작품들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와 범위의 그림들을 접할 수 있었으며, 판화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영국에서의 짧은 교사 생활을 끝내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야경’과 같은 수많은 걸작을 그렸고 당대에 명성을 얻었다.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하였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릴 적에 일찍 학교 교육을 그만두고 화가로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역사화가 야코프 이삭스존 반 스바넨부르크 밑에서 3년간 배운 후,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손꼽히는 역사화가 페테르 라스트만 밑에서 짧게 도제 생활을 했다. 새로운 기술들을 익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방을 열었고, 많은 자화상들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상을 포착하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곤 했고, 자화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극적인 장면에서도 이런 감정들을 전달했다. 그...

  •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루어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죽음과 소녀>는 실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친구이자 피후견인이었던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선들을 더욱 발전시켜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빈 공간을 배경으로 툭툭 튀어나온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한 실레의 자화상은 고뇌하는 미술가 신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은 그의 작품의 어느 일면일 뿐이다. 실레의 도시 풍경화들은 역동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파로 넘쳐나는 도시 모습의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감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실레가 그린 장인의 초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 궁정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난 라파엘로는 교황청에 그린 프레스코화로 크게 성공했으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아테네 학당>이다. 서른일곱에 죽음을 맞이했으며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판테온에 묻혔다.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라파엘로는 우르비노 공작의 궁정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우르비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받은 문화적 혜택과 매력적인 그의 성품 덕분에 라파엘로는 쉽게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라파엘로가 어렸을 때 아버지 산티가 죽었지만, 죽기 전에 천재인 아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1500년경에 젊은 라파엘로는 페루자 부근에 있는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이 무렵에 라파엘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프레스코를 완성했다. 제단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1502~1503경)와 같은 라파엘로의 초기...

  • 인상주의 화가. 야외에서 그린 초상화 ‘양산을 쓴 리즈’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외광회화로 유명해지는 데 일조한 작품이다. 인상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화가였지만 르누아르는 18세기 고전 미술로 관심을 돌려 보다 견고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첫 번째 직업은 도자기에 무늬를 그려 넣는 일이었다. 그는 받은 임금으로 미술 교습을 받았고, 이 교습 시간에 그에게 인상주의를 알게 해준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데리크 바지유를 만났다. 1862년에 르누아르는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했고, 곧 파리 살롱전에서 전시하기 시작했지만, 이때 전시했던 작품은 그가 스스로 파괴해버려서 남아 있지 않다. 1867년에는 그 당시 애인을 그린 초상화 <양산을 든 리즈>(1867)가 살롱전에 통과되었다. 이 작품은 작업실이 아닌 야외에서 그린 초상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르누아르와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야외에서 직접 보고 그리는 풍경화인...

  •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적 대표자인 잭슨 폴록은 살아생전에 유럽의 현대 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명이다.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1928년 로스앤젤레스의 매뉴얼 미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폴록은 화가이자 삽화가인 프레더릭 존 드 세인트 브레인 슈반코프스키의 소개로 신지학 협회를 알게 되었다. 신지학 협회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자연적인 정신성을 추구하는 그룹이었다. 폴록은 신지학의 개념들을 공감하고 받아들였고, 이것은 그의 작품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뉴욕으로 온 폴록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들어가, 지방주의 화가인 토마스 하트 벤턴 밑에서 드로잉과 회화, 구성을 배웠다. 대공황 시절 폴록은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에 화가로 고용되었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전형적인 미국 서부 주제에 기초한 풍경과 구상 회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는...

  • 프랑스 화가. 인상주의와 플랑드르 미술에 영향을 받았다.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알려진 작품인 ‘사과와 오렌지’는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끌어올렸다. 말년에는 ‘목욕하는 사람들’처럼 몽환적으로 채색된 누드화 습작을 주로 그렸다. 부유한 은행가의 사생아로 태어난 폴 세잔은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를 꿈꿨으나, 고압적인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그의 꿈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사생아라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이 세잔을 평생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스물두 살에, 세잔은 파리에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미술 공부를 했고, 다른 화가들과도 교류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심한 우울증을 겪었는데, 자괴감에 빠져 자신의 그림들을 부숴버리곤 했다. 그는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갔으나, 화가로서 성공할 것을 다짐하며 1862년에 다시 파리로 향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작가 에밀 졸라와 함께 그는 정치적으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자신을...

  • 미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프랑스의 혁명적인 미술가.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 같은 소재를 활용해 '레디메이드'란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 이후 미술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뿐 아니라 개념미술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나 자전거 바퀴와 같은 다양한 소재들을 활용해 '레디메이드'란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 이후, 미술은 그 이전 시대의 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뒤샹은 피에로 만초니의 <미술가의 똥>(1961)처럼 배설물이 담긴 깡통이나 심지어는 데미언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1991)에 등장하는 상어까지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미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혁명적인 미술가다. 젊은 시절에 뒤샹은 상징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상징주의 화가인 오딜롱 르동이 자신의 초기 작품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상징주의뿐 아니라 후기...

  •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며 동시에 모델로 알려졌다. 로댕의 작품은 처음에는 그녀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후 자신만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카미유 클로델은 프랑스 조각가인 알프레드 부셰와 작업실을 함께 썼는데, 1880년대 초 바로 이곳에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와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 이후 클로델은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며 동시에 모델이 되었으며, 로댕의 <칼레의 시민>(1888) 제작에도 참여했다. 클로델은 그룹 인물상과 인체의 관능성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그녀의 작품 <성숙>(1894~1895)에는 로댕식의 활기 넘치는 입체감 표현에, 그녀의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성향이 가미되어 있다. 로댕의 작품은 처음에는 그녀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후 점점 더 그녀 자신만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처럼 로댕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점과 일부 작품들이 지나치게 관능적이라는 이유로 전시가 거부된 점이, 틀림없이...

  • 프랑스 화가. 신체 장애가 있던 툴루즈 로트레크는 물랭 루주와 다른 밤업소에 가서 매일 밤 스케치를 하면서 보내면서 몽마르트르에서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 덕분에 잔 아브릴과 라 굴뤼 같은 무용수들의 이름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서른여섯에 생을 마감했다. 화가, 도안가, 그래픽아트 미술가, 삽화가, 석판화 화가였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유년 시절에 겪은 신체장애로 미술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툴루즈 근처 알비에서 프랑스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이후에 다리의 성장이 멈춰버렸고, 이를 제외한 신체 부위는 정상적으로 발육했다. 결국 툴루즈 로트레크의 키는 작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그는 수많은 풍자만화의 소재가 되었다. 부유하고 괴팍스러운 그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툴루즈 로트레크의 파리에서의 학비를 지원해주었고, 작업실도 얻어주었다. 툴루즈...

  • 프랑스의 화가. 회화, 조각, '종이 오리기'를 포함한 그래픽아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마티스는 야수주의의 창시자로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푸른 누드 IV’는 마티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난 앙리 마티스는 열아홉 살이 되어서야 미술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지만, 그는 파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고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는 회화, 조각, '종이 오리기'(cutouts)를 포함한 그래픽아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십대 후반에 어느 변호사의 조수로 일했던 마티스는 드로잉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몇 년 후 맹장염 수술을 받은 그는 오랜 회복기 동안 그림에 대한 열정이 눈을 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891년 마티스는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는 쥘리앙 아카데미에서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수업을 듣고, 에콜 데 보자르에...

  •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 농촌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들은 '사실주의 미술의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미술가동맹의 회장이었던 쿠르베는 정치 활동에도 열심이었으나, 파리 코뮌이 무너진 후 체포되었고 그 결과 파산하게 되었다. 귀스타브 쿠르베는 자기 자신을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반란군으로 그리고 싶어 했지만, 사실 그는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가족들 역시 예술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이해해주어, 그가 안정적인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재정상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쿠르베는 브장송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해, 1839년에는 파리로 이주했지만 이 대도시에 정착하지는 못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랐던 그의 태생이 그로 하여금 다시 시골로 가도록 종용했기 때문이다. 쿠르베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의 수준 높은 아카데미적인 교육 대신에,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는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 프랑스 화가. 무명미술가협회를 설립하고 전시한 ‘인상, 해돋이’는 이런 경향의 화풍이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명암 표현으로 마치 실체를 가진 듯 그려낸 ‘건초더미’ 등의 연작들은 회화 역사상 이정표가 되었다. 클로드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르아브르로 이사했다. 르아브르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그가 후일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곳에서 노르망디 바닷가와 시골을 탐험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급격히 변화하는 날씨가 바다와 육지에 미치는 효과를 관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방화가 외젠 부댕의 회화 기법이 모네의 표현법에 평생토록 영향을 주었다. 부댕은 모네에게 야외에서 직접 눈으로 관찰하며 그리는 '외광회화'의 개념을 소개해주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파리로 간 모네는 전통주의자인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들어가 후일 인상주의 화가 동료가 될 피에르 오귀스트...

  •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조각가. 보테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육감적 인물과 '모나리자, 열두 살'처럼 문화적 아이콘을 장난스럽게 재해석한 작품으로 인해 '키치' 미술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인간의 형상을 재미나고 즐겁게 표현한 바탕에는 사회에 대한 비평이 깔려 있다. 일부 비평가들은 페르난도 보테로의 회화와 조각 작품에 등장하는 육감적인 인물들 때문에, 그의 미술을 '키치'(kitsch)라고 폄하했다. 아마도 살집 있고 관능적이며 토실토실 살찐 천사 같은 모습은 사이즈 제로를 추구하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유행에 뒤처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는 <모나리자, 열두 살>(1959)처럼 문화적 아이콘을 장난스럽게 재해석한 것이 미술가의 의도를 단순히 장난으로 보이게끔 만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테로의 작품에 대한 이런 식의 해석은 너무 제한적이다. 그가 인간의 형상을 이처럼 재미나고 즐겁게 표현한 바탕에는 사회에 대한 비평이 깔려 있다. 보테로는 때로 과장된 인체 비례를 통해...

  • 프랑스 화가. 가장 뛰어난 데생화가 중 한 명인 드가는 고전주의 미술과 근대 미술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1880년 색다른 시점의 구도와 빠른 붓질로 그려진 그림으로 호평을 받았다. 여성혐오증이 있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유명한 작품 중 대다수는 여성을 묘사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화가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는 고전주의 미술과 근대 미술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다. 그는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조각뿐만 아니라 18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진술에도 정통했다. 드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자식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려 집안에 작업실을 두는 것을 허락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와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드가는 1855년에 앵그르를 만났는데, 그는 드가에게 "선에 충실하라"라는 유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드가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고 이후 이탈리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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