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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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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316,229건
  • 이 그림을 주문했던 터키의 전직 외교관 카릴 베이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에로틱 미술 수집가였을 것이다.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는 이 터키인 후원자의 주문으로 일련의 호색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그중에는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레즈비언 커플을 보여주는 <잠자는 사람들>과 시트로 머리를 가린 여자의 복부, 벌린 다리, 생식기, 가슴, 곤두선 유두, 음모를 묘사한 <세상의 기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인 '세상의 기원'은 인류를 유지시키는 여성의 출산 능력에 보내는 찬사이며, 또한 쿠르베의 성(せい)에 대한 집착과 여성의 누드를 보는 것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기도 한다. 춘화 외의 회화에서는 절대 그려지는 법이 없었던 음모가 묘사된 것은 주문자 카릴 베이가 이 그림을 춘화로 의도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쿠르베가 개척했던 사실주의의 증거이기도 하다. 쿠르베는 회화에서 사실성을 엄격하게 고수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림들이 전시되자 악평이

  •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 네덜란드 시절에는 어두운 색채로 비참한 주제를 특징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는다. 주작품은 ‘해바라기’, ‘아를르의 침실’, ‘의사 가셰의 초상’ 등이 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로, 프로트 즌델트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사망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9~1876년 화상 구필의 조수로 헤이그, 런던, 파리에서 일하고 이어서 영국에서 학교교사,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의 일을 보고, 1880년 화가에 뜻을 두었다. 그때까지 짝사랑에 그친 몇번의 연애를 경험했다. 1885년까지 주로 부친의 재임지인 누넨에서 제작활동을 했다. 당시의 대표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 있다. 네덜란드 시절에는 어두운 색채로 비참한 주제가 특징적이었다.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는다....

  • 신비의 화가 뭉크는 죽음의 검은 천사 속에서 살았다. 인간 뭉크는 5형제의 둘째로 1863년 러턴(Løten)에서 태어났지만, 군대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크리스티아나로 옮겼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 소피를 폐렴으로 잃었고, 이후 남동생 안드레아스도 같은 병으로 죽었다. 뭉크는 1879년 엔지니어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진로를 바꿔 1880년 크리스티아나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에 입학, 대학도서관에서 혼자 예술사를 공부했다. 아카데미의 보수성은 그와 다른 여러 젊은 학도들로 하여금 1888년 학교를 떠나게 만들었고 크로그가 가르쳤던 풀토스텐(Pultosten) 스튜디오로 옮겼는데, 당시 크로그는 파리에서 돌아와 뭉크에게 유럽 예술의 국가적인 인식과 흐름을 소개했다. 1883년 뭉크는 크리스티아나 국전에 데뷔하였고, 프리츠 타우로의 오픈 에어 아카데미(Open-Air Academy)에 참석했다. 타우로는 뭉크를 지지하여 그의 「MORNING」을 구매했을 뿐 아니

  • 전 3막. 일본을 배경으로 한 비극(tragedia giapponese). 일본에서 살았던 미국인 선교사 존 루서 롱(John Luther Long)의 장편소설 『나비 부인』을 바탕으로 주세페 자코사와 루이지 일리카가 대본을 썼다. 존 루서 롱의 소설은 피에르 로티(Pierre Loti)의 작품인 『국화 부인(Madame Chrysantème)』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사전 지식] 오페라 <나비 부인>은 순수한 마음으로 남편 핀커턴을 믿고 사랑한 조초 상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작품에 순수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본의 선율이 상당 부분 사용되었다. 푸치니의 다른 걸작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멜로디가 숨어 있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끌어올린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소재도 바로 <나비 부인>이다. 구성도 이와 같다. 다만 원작에는 없는 헬리콥터가 브로드웨이에는 등장한다. <나비 부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 전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다. <나비 부인>이 공연되면 관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 소수서원(紹修書院しょいん)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すせおおとり)이 1542년(중종 37) 8월에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やす珦)을 배향(はいとおる)하는 사당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543년 8월 11일에 완공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しらくもほら書院しょいん)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주세붕이 서원 이름을 '백운동'으로 한 것은 소수서원의 자리가 중국 송(そう)나라 때 주희(しゅ熹, 1130∼1200)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しろ鹿しかほら書院しょいん)이 있던 "여산(廬山)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백록동'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이 편찬한 『죽계지(たけけいこころざし)』 서문에는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의 심성론(心性しんせいろん)과 경(たかし) 사상을 수용

  •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짧은 생애였지만 가장 유명한 미술가로 남아있다. 초기 작품은 어두운 색조의 작품이었고, 후기 작품은 표현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고흐의 작품은 20세기 미술운동인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 반 고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가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은 20세기의 미술운동들, 특히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토대를 제공했다.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생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1869년에 그는 프랑스에 본점이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옛 대가들의 작품과 동시대 작품들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와 범위의 그림들을 접할 수 있었으며, 판화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영국에서의 짧은 교사 생활을 끝내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 창덕궁(昌德まさのりみや)은 조선 왕조의 도성인 한양 북쪽에 위치한 이궁이었다. 응봉(膺峯)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자락에 자리잡았는데, 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동남쪽으로는 종묘가,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이 위치해 있다. 1392년 건국된 조선 왕조는,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왕자들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다. 이때 태종은 무악 아래 새 도성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으로 재천도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태종은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궁궐을 하나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고 이름지었다. 창덕궁은 1411년(태종 11)에 조성한 진선문(すすむぜんもん)과 금천교, 1412년에 건립한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あつしもん)에 이어 여러 전각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인정전(仁政じんせい殿どの)을 다시 짓고 궁궐의 각 전각 명칭을 새로 정하였다....

  •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영화에서 페르소나는 종종 영화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한다.

  •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판화가. 샤갈의 작품 주제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영원의 사랑이었다. 샤갈에 있어서는 인간이나 동물들, 특히 연인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데 이것은 사랑의 신화를 표현한 것으로 신선하고 강렬한 색채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판화가. 백러시아의 비데브스크에서 출생. 1910년 파리에 왔다. 이 시대의 작품에는 고향의 풍물이 추억처럼 나타난다. 『나와 마을』(1911, 뉴욕, 현대미술관)등. 1914년 러시아에 돌아갔고, 혁명 후에는 미술 행정의 요직을 차지했으나, 1922년 재차 파리에 왔다. 제 2차 대전 중 도미, 1947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샤갈의 주제는 지상의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영원의 사랑이다. 샤갈에 있어서는 인간이나 동물들, 그중에서도 연인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데, 이 사랑의 신화를 지탱하는 것이 신선하고 강렬한 색채이며, 이는 전후(戰後せんご)에 더 심해졌다. 유채 외에 고골리의 『죽은 영혼』등의 삽화...

  •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야경’과 같은 수많은 걸작을 그렸고 당대에 명성을 얻었다.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하였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릴 적에 일찍 학교 교육을 그만두고 화가로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역사화가 야코프 이삭스존 반 스바넨부르크 밑에서 3년간 배운 후,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손꼽히는 역사화가 페테르 라스트만 밑에서 짧게 도제 생활을 했다. 새로운 기술들을 익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방을 열었고, 많은 자화상들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상을 포착하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곤 했고, 자화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극적인 장면에서도 이런 감정들을 전달했다. 그...

  • 피카소 회화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이름으로 스페인 내란 중, 1937년 4월 26일 프랑코군을 지원하는 독일 비행기가 이 마을을 맹폭하여 2000여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가 동년의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을 위해 그 부조리와 비극을 테마로 약 2개월의 단기간으로 대작 『게르니카』를 완성시켰다. 전쟁의 광포성과 운명의 장난 밑에 무력한 인간의 비참함이 투우에서의 빛과 어둠의 상극극(相克そうこくげき)을 빌어 상징화되어 있다. 오랫동안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피카소의 유지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유채화, 349cm×776.6cm.

  • 프랑스의 화가. 파리에서 출생. 1948년 20세로 비평가상을 수상하여, 추상파에 대항하는 구상회화의 왕자라는 호평을 받았다. 백, 흑, 회색의 침침한 배경에다 까칠까칠한 깡마른 인물을 등장시켜, 수직선과 수평선의 금욕적 구도에 의해 대전 후의 불안을 표현했다. 대표작 『채찍질』(1951). 판화도 많다.

  • 모든 빛을 흡수하는 색. 이미지는 무거움, 두려움, 암흑, 공포, 죽음, 권위 등을 상징한다. 성직자, 수녀 등과 지배자, 간부들의 색이나 죽음을 애도하는 색으로도 사용한다. 심리적으로 편안함과 보호감, 신비감을 준다.

  •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 종묘(宗廟そうびょう)는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 그리고 실제로 왕위(王位おう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죽고 나서 왕의 칭호를 올려받은 왕과 그 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행하던 왕실의 사당이다. 조선 왕조를 연 태조(ふとし) 이성계(李成かつら, 재위 1392∼1398)는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ことぶきあきらみや)에서 왕위에 오른 뒤부터 종묘 건설과 도읍지를 정하는 일에 무엇보다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시설이고, 도읍지는 국가 통치의 기반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즉위 12일만인 7월 28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왕(きよしおう), 익왕(つばさおう), 도왕(おう), 환왕(桓王)으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こう), 정비(さだ), 경비(けい), 의비(懿妃)의 존호(尊號そんごう)를 올렸다.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시대 남경(南京なんきん)의 이궁(離宮)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내는 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 파퓰러 아트 (Popular Art, 대중예술)를 줄인 말로서, 196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의 한 경향을 가리킨다. 그 발단은 매스 미디어에 주목한 1950년 초의 리차드 해밀튼 등의 영국작가였으나, 반예술적인 지향(志向しこう) 밑에 신문의 만화, 상업디자인, 영화의 스틸(still), TV 등, 대중사회에 있어서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주제 삼은 것은 뉴욕의 팝 아티스트들이다. 자스퍼 존스, 라우센버그(⇒네오 다다)를 선구자로 하고, 리히텐슈타인, 워홀, 올덴버그, 로젠퀴스트, 웨세르만, 시걸 등이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팝 아트는 서브 컬처나 풍속에 접점(接點せってん)을 구한 1960년대 미술의 큰 물결 중 하나로, 미국 만이 아니라 유럽이나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더욱이 세계적으로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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