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 상씨
나라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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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
시조 | 상국진(尙國 |
집성촌 | 경기도 과천시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내지리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야룡리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대촌리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옥산리 |
주요 인물 | 상애, 상달, 상진, 상붕남, 상인첨, 상득용, 상호, 상병헌 |
인구(2015년) | 2,272명 |
목천 상씨(
12세손 상진(尙震)이 조선 명종조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15년 동안 조선의 재상으로 국정을 총괄하였다.[1]
역사
[편집]시조 상국진(尙國
상국진의 아들 상득유(尙得儒)가 고려 문종(
상득유의 아들 상원(尙愿)이 급사(
9세손 상영부(尙英
12세손 상진(尙震)이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1549년(명종 4) 우의정이 되고, 1551년(명종 6) 좌의정을 거쳐 1558년(명종 13) 영의정(
기원
[편집]상씨(尙氏)는 본래 중국(
1976년 간행된 《병진보(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인물
[편집]- 상진(尙震, 1493년 ~ 1564년) : 1519년(중종 14)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1526년 예조좌랑 때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8년 사헌부장령(
司 憲 府 掌 令 )을 거쳐 1534년(중종 29) 대사간(大 司 諫)이 되었고, 1539년(중종 34)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1541년(중종 36)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병조판서에 제수되어 조선의 국방을 총괄하였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우참찬이 되었고, 1549년(명종 4) 이기·윤원형의 추천으로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으며, 1551년(명종 6) 좌의정이 되었다.[3] 정승이 되어서는 심통원과 사돈을 맺었다. 1558년(명종 13) 영의정에 올라 14년 동안 조선의 재상으로 국정을 총괄하였다. 1563년(명종 18) 영중추부사(領 中樞 府 事 )로 전임된 뒤 기로소(耆老所 )에 들어갔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성안(成安 )이다.[4]
- 상붕남(尙鵬
南 ) : 상진(尙震)의 아들. 중종 때 사관이 되어 우찬성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중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음보(蔭 補 )로 벼슬에 등용되어 판결사(判決 事 )에 이르렀다. 외손자 이기준(李 耆俊)은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 文 院 正字 )를 지냈다.[5]
- 상득용(尙得
容 ) : 영의정 상진(震 )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 將 )이 된 뒤 선전관·훈련원판관·화량진첨사(花 梁 鎭僉使 ) 등을 역임하였다. 무인으로서 독서를 즐겨 『육도(六 韜)』·『손자(孫子 )』·『무자(武子 )』 등 병서에 해박하였고, 경사(經 史 )에도 밝았으며 천문·주수(籌數)에 두루 능하였다. 말년에는 고향에 돌아가 제자양성에 노력,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6] - 상직현(尙稷鉉) : 고종의 호위무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휴대용 해시계인 ‘일영원구’(
日影 圓 球 )를 제작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7]
본관
[편집]목천(
분파
[편집]15세손에 이르러 상자산(尙子
과거 급제자
[편집]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15명을 배출하였다.[8]
- 문과
상진(尙震)
- 무과
상광택(尙
- 생원시
상동규(尙東奎) 상빈주(尙賓
- 음관
상우현(尙禹鉉)
항렬자
[편집]15세 |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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詹(첨) | 致(치) | 鉉(현) | 炳(병) | 淙(종) 澈(철) |
熙(희) |
珉(민) |
鏞(용) 鎬(호) |
桓(환) |
집성촌
[편집]문화재
[편집]- 성안공 상진 묘역(
成安 公 尙震墓域 )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호. 높이 362cm, 비신 높이 220cm, 너비 106cm, 두께 36cm. 성안은 조선 중기의 재상 상진의 시호로, 이 비는 1566년(명종 21)에 세워졌다. 화강암제 장대석 기단과 네모받침돌 위에 대리석제 비신(碑 身 )을 얹은 다음, 그 위에 화강암제 첨석(檐石)을 얹었다. 받침돌 4면에는 방형 구획 속에 꽃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은 손자 상시손(尙蓍孫 )의 부탁으로 좌찬성 홍섬(洪 暹)이 지었고, 글씨는 송설체(松雪 體 )에 뛰어났던 여성군(礪城君 ) 송인(宋 寅 )이 썼으며, “成安 公 神道 碑銘 ”이란 두전(頭 篆)은 둘째 사위 예문관검열 이제신(李 濟 臣 )이 썼다. 비문에는 중종·인종·명종대에 활약한 상진의 행력과 충후(忠 厚 )하고 전중(典 重 )한 그의 품성과 행위에 대해 적혀 있다.
관련 단체
[편집]- 상문고등학교(尙文
高等 學校 ) -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상문고 부지는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尙震) 정승이 서거하면서 위토로 하사 받은 20여만평의 일부로 목천 상씨 성안공파의 문중 선산이었다. 1968년 서초구 일대가 남서울도시계획에 들어가 도로가 뚫리게 되자 선산을 지키기 위해 목천 상씨 문중에서 성씨인 尙자와 학문을 뜻하는文 자를 합쳐 학교를 건립하였다.
인구
[편집]- 1985년 499가구 2,054명
- 2000년 702가구 2,293명
- 2015년 2,272명 (남 1,144명 + 녀 1,115명)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명종실록 24권, 명종 13년 5월 29일 병자 2번째기사
- ↑ 국조인물고 권43
- ↑ 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 8월 23일 무인 4번째기사
- ↑ 상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상붕남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상득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고종 황제 경호원은 왜 해시계를 품고 다녔을까”. 2023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 목천 상씨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