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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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좌참찬 | |
재임 | 1605년 ~ 1606년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69년 12월 10일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
사망일 | 1618년 8월 24일 (48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직업 | 문관 |
본관 | 양천 |
부모 | 허엽(부), 강릉 김씨(모) |
형제자매 | 허난설헌(누나), 허봉(형), 허성(형) |
허균(
생애
[편집]강릉 출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1등(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
당색(
생애 초반
[편집]출생과 가계 배경
[편집]허균은 1569년(선조 3년) 음력 11월 3일에 강릉 초당동에서 군수와 동지중추부사(
그의 부친 초당 허엽(
허균의 나이 12세인 1580년(선조 13년)에 부친 초당이 상주에 있는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학문은 둘째 형의 벗인 이달에게서 배우다가 나중에 류성룡에게 배웠다. 서자 출신으로 출세가 어려웠던 이달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 허균도 재취 부인의 소생으로 서자와 다름없는 형편이라서 이달의 불우(
유년기
[편집]어릴 적부터 그의 기억력은 비상하였고, 10세 이전의 소년기 때 글을 잘 지어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이 칭찬(
稱讚 )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 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모 사위 추연(秋 淵 )만은 그 시를 보고 ‘후일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우야담[2]>)
당대 명사였던 추연(
나는 기사년(
己 巳 年 ·1569, 선조 2년) 병자월(丙 子 月 ·11월) 임신일(壬 申 日 ·3일) 계묘시(癸 卯 時 )에 태어났다. 성명가(星 命 家 ·사주, 관상가)가 이를 보고 ‘신금(申 金 )이 명목(命 木 )을 해(害 )치고 신수(身 數 )가 또 비었으니 액(厄 )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여러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 水 )가 중간에 있는 고(故 )로 수명이 짧지 않겠고 강수가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 金 )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하리라’라고 말했다. 나는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해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년에서 18년 이래 전패(顚沛)와 총욕(寵 辱 )이 반복되는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隱然 中 )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
(<성소부부고.[2]>)
5살 때부터 형 허봉의 벗인 손곡(蓀谷)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9세 때 이미 묘사를 잘하여 시를 잘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외로움을 달래려 더욱 시문 공부에 전념하였다. 첫 스승인 이달은 둘째 형의 벗으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
후에 이달에게 시와 글을 배우다가 매부 추연(
청년기
[편집]초시, 생원시 합격과 임진왜란
[편집]일찍 부친을 여의었으나 20세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이복 형 허성의 집과, 강릉의 외가를 오가며 풍족하지는 않았으나 어렵지 않은 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안동 김씨 김대섭(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하나 열다섯 살 때 그와 가까웠던 친형 허봉이 이이를 탄핵하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고, 김성립(
24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피하던 와중에 부인 안동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하고 어린 아들도 전란 중에 병사한다. 가족을 잃은 허균은 이후 집필에 몰두했는데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호 교산(
그 뒤 허균은 선산 김씨로 동인의 초대 당수인 김효원의 딸과 재혼한다. 김효원의 동생이자 후처의 숙부인 김이원은 북인의 중진이었다. 이때 그는 광해군을 수행했는데 그 공로로 후에 위성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다.
김종직 비판과 주목
[편집]종전 후 허균은 학문 연구와 과거를 준비하던 중 글 「김종직론」을 지어, 사림의 중시조로 추앙받던 김종직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 | 김종직론( 천하에 이록( 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유( 계유정난(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복제(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 그가 조의제문( |
” |
허균은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 찬위를 비난하면서도 그 자신은 세조가 주는 관직을 받았다고 비난했다.
허균은 조의제문 따위를 지은 것은 가소롭다고 하고, 김종직을 가리켜 위학자(
허균의 저서들은 정조 이전까지 금서(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편집]1592년 당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훗날 선무원종공신 1등(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반도 최초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고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문과(
바로 설서(
1598년 황해도 도사(
정치 활동
[편집]임진왜란 직후
[편집]1599년 5월 다시 황해도 도사로 나갔다. 그러나 그해 12월 한성부의 기생을 데리고 간 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게 계속 탄핵받고 파직당하고 만다. 1600년 복직, 춘추관기주관(
1601년(선조 34년) 충청·전라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으로 부임한다. 전운판관이 되었을 때는 부안의 유명한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
1601년 11월 형조정랑이 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1602년초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해 5월, 전에 세자시강원으로 있을 때 종1품 대신인 좌찬성 심희수를 시강원의 낭관인 그가 물러가라고 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지평 윤경(
1602년 성균관사예(
탄핵과 파면, 복직
[편집]이후 사복시정(
1606년 4월에 원접사 유근(
1606년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가 출간되자 조선의 문화를 명나라에 알린 공로로 특별히 삼척부사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재직 중 부청 근처의 법당에 출입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목격되어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하고 참선한다는 이유로 1607년 5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받았다. 그러나 선조는 듣지 않다가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이 계속되자 쫓겨났다.
그해 음력 5월 6일 숭불(
중국 방문과 난설헌 문집 편찬
[편집]1608년(선조 41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누나인 난설헌(
그런데 귀국 후 1610년 2월 명에 파견될 천추사로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4월 부호군에 제수된 뒤 명나라에 다시 갈 천추사에 임명되자 병을 핑계로 여러 번 상소를 올려 거절했다. 이 일로 탄핵당하고 부호군직에서 파직되었다. 이어 사헌부에서 여러 번 그를 탄핵하였으나 광해군이 이를 듣지 않았다.
1610년 10월 전시(
1610년(광해군 2년)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에 유배됐고 유배지에 간 뒤에도 양사(
허균은 당시 『홍길동전』의 저자를 밝히지 않았으나 북인계 인사 유몽인이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라고 외부에 알리면서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10년 5월에는 명나라의 주지번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내용이 화제가 되어 조정에 들기도 했다. 1612년 『홍길동전』을 완성한 뒤 바로 석방되었으며, 그 뒤 몇 년간은 태인(
계축옥사와 역모 논란
[편집]계축옥사 전후
[편집]1613년(광해군 5년) 초 귀국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 때 진술자 명단에 언급이 되어 화를 입을 뻔했으나 그는 명나라에 천추사로 다녀왔으므로 다행히도 피화(避禍)하였다. 박응서(
<광해군일기>를 보면, 연루(
대북당에 입당
[편집]계축옥사에서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 출신의 서양갑·심우영이 처형당하자 그는 본심을 숨기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대북당(
1614년 12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천추사(
1615년 2월 귀국하였으며, 2월 중순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다. 그해 5월 문신들을 상대로 한 정시 문과에서 인정전이란 주제로 시를 지었는데 수석을 차지하였다. 5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6월에는 전년도 천추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서책(
1615년 8월 우승지, 좌승지 등을 지내고 그해 말 동지 겸 진주부사(
흉서 문제에 연루
[편집]1616년(광해군 8년) 사직 제조(
1617년 2월 부사직(
인목대비 폐모론
[편집]1617년(광해군 9년) 말부터 허균은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 선 것은 후일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2] 허균이 사형당한 후 그의 외손 이필진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2]”이라고 그를 변호했지만, 허균은 남의 사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폐비 논의에 앞장섰다.[2] 그해 11월 행 사직으로 폐모론에 적극 참여하였다. 심지어 깡패들을 모아 궁궐 뒷산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정황상 인목대비 암살을 계획한 것 같다. 이 행동은 후에 허균 본인이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가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찬성하자 그를 좋게 보던 인사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비교적 그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던 기자헌조차 허균을 비난하였고, 그의 문인이자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렸다. 한편 신분제도와 서열 차별 등에 항거하기 위하여 서자와 불만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였으나 그의 거사 계획이 소문이 나면서 외부로 확산되었다. 이는 이이첨, 김개시 등이 칠서의 변에 연루된 서자들과 친분이 있던 허균을 의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허균은 이이첨, 정인홍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북인 내에서도 폐모에 반대하는 소북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2] 이 일로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고 길주로 유배되자, 그 아들 기준격은 허균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의심,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난다. 바로 허균도 상소를 올려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변명하였다.
몰락과 죽음
[편집]탄핵과 사형
[편집]1617년 12월 12일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26일 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가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한다. 1618년 1월 기준격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고, 1618년 1월 좌참찬이 되고 그 역시 자신이 역모와 무관하다며 해명을 한다. 결국 그해 2월 우의정 한효순 등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이끌고 허균과 기자헌을 추국하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청한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2]. 이 무렵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2] 허균의 딸은 소훈이 되어 입궐하였다. 허균에 대한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고, 그를 제거하기로 기도한다.
그런데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은 허균의 심복 현응민(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허균에게는 계속 국문이 열렸고 그때마다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결국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되고,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7]
최후
[편집]그해 사헌부와 사간원은 계속 허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8월 21일 사헌부의 탄핵 상소가 올려진 뒤 바로 파면당했다.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을 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했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8월16일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 놓고 다음날 체포된다.[2] 그는 도피하라는 지인들의 권고를 거절하고 자신의 저서와 작품들, 누나 허난설헌의 시문들을 모두 손수 장녀의 집에 옮겼다. 그는 사위 이사성(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
그가 체포되자 그와 관련된 인물이 대부분 체포되었고 사위 이사성 역시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으나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친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들어 극적으로 화를 모면하였다. 그의 조카인 허채, 허보, 허신 등도 의금부로 잡혀가 국문을 당했지만 허균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들어 화를 모면하였다. 그가 처형된 직후에도 계속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의금부와 포도청에 불려다니며 공초를 당했다.
사후
[편집]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훗날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산 근처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의 사후 연좌제가 적용되어 강릉에 있는 아버지 허엽의 묘소도 부관참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비 오는 날이면 허균의 선영에는 울부짖음소리가 나, 어느 선비가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라는 내용의 위령제를 지낸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한다. 허균 사후 그의 후손들은 끊긴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그의 후손들 중 일부는 파가 다른 타 문중(허목 봉례공파)에 양자로 가거나 타인의 후손인 것처럼 변성명을 하고 후손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허균의 살아남은 아들(허굉)의 직계 자손들이 가첩을 통해 허균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여 오다가, 1995년 양천허씨 허추자산공파 세보에 판도좌랑공 11세손(균)파 교산공파로 숨겨진 혈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인 홍길동전은 인조 반정 직전 유몽인 등이 자신들의 문집과 서신 등에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홍길동전의 저자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의 문집과 성소부부고 등은 1668년 외손자 이필진이 간행하여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1623년(인조 1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그가 북인과 대북당원이었던 탓에 복권되지 못하였다. 정조 때와 고종 때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노론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한다.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그의 저서 홍길동전과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사상과 활동
[편집]그는 자신의 문집에서 〈관론(
학문 편력, 사상
[편집]그는 적서차별의 부당함과 부패관료를 규탄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겨 사회비판적인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학론(
인재 등용론
[편집]그는 적자와 서자 모두에게 공평하고 균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스승 손곡 이달이 서자로서 출세하지 못한 것이 이유라고도 하고, 허균 자신이 재취부인의 소생으로 서자들과 다를바 없는 불우한 처지라서 이에 공감했다는 설도 있다.
사상의 자유
[편집]유교 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사상적 편력은 당대에도 회자화되었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도교와 노장사상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이러한 사상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빠질뻔 했다고도 고백하였고, 유교 이외의 사상에서도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불교에 호감, 흥미를 갖는다는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 등을 통해 일부 밝혔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
죽음에 대한 의문점
[편집]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있다.
전한다.[8]
음식 평론
[편집]허균은 한국 최초의 음식 평론서도 남겼다. 그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에 관한 내용으로 꾸며진다.[9] 이 책에는 허균이 40 평생 먹어본 조선 최고의 맛이 기록돼 있다.
3일 동안 입에서 향이 가시지 않는다는 강릉의 방풍죽, 회 한 젓가락에 돌아갈 곳을 잊게 한다는 한강의 숭어와 웅어 등 177가지 별미에 대한 평가가 들어있다. 제작진은 "이 책에 등장하는 특산물 중에는 현재 사라졌거나 식재료로 이용되지 않는 것들도 많다"며 "조선 중기 우리 음식 문화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9]
평가
[편집]유몽인은 그가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2] 고 평가했다. 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허균이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회까지 신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10] 한편 기인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볼 때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11]
허균의 사회비판적인 의식과 억불숭유사회에서의 불교 숭상, 격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 등으로 인조반정 뒤에도 복권되지 않았다.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것도 조선 말기 갑오경장 이후부터였다.[12]
가족
[편집]허균이 처형당할 당시 이미 출가한 두 딸은 연좌되지 않았다. 그밖에 이복 형 허성과 친형 허봉의 아들들 역시 연좌되지 않는다. 동인의 초대 당수인 성암 김효원과는 이중 인척이 된다. 김효원은 그의 후처의 친정아버지인데 그의 형 허성의 딸이 김효원의 아들 김극건의 부인이 된다. 김효원의 아들 김극건은 그와 처남 매부간이면서 조카사위-처삼촌간인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그의 아들들은 처형당했고, 허굉 등 일부만이 기적적으로 숨어서 후사를 이었다. 또한 이사성에게 시집간 큰딸, 광해군의 세자인 폐세자 이질의 후궁인 소훈으로 책봉된 딸, 의창군에게 시집간 이복형 허성의 딸은 화를 면하였다.
- 조부 : 허한(
許 澣) - 조모 : 창녕성씨(
昌 寧 成氏 ) - 군수 성희(成 熹)의 딸- 백부 : 허구(
許 昫) - 아버지 : 허엽(
許 曄) - 서경덕의 문인. 경상도 관찰사.[13] - 전모 : 청주한씨(
淸州 韓 氏 ) - 서평군 숙창(叔昌)의 딸 - 생모 : 강릉 김씨(
江 陵 金 氏 ) - 예조참판 광철(光 轍 )의 딸- 동복형 : 허봉(
許 篈[14], 1551년 - 1588년)- 조카 : 허채(
許 寀) - 조카 : 허상(
許 宀+桒) - 조카딸 : 김극건(
金 克 鍵 )에게 출가
- 조카 : 허채(
- 동복누나 : 허초희(
許 楚 姬 , 1563년 - 1589년) 호(號 ) 난설헌(蘭 雪 軒 ) - 매형 : 김성립(
金 誠 立 )- 조카딸 : 김씨(
金 氏 ) - 조카 : 김희윤(
金 喜 胤 )
- 조카딸 : 김씨(
- 전처 : 정부인 안동김씨(
安東 金 氏 , 1571년~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15])), 도사 김대섭(金 大 涉 )의 딸- 아들: 요절 (1592 - 1592)
- 아들: 요절 (? - 1618)
- 장녀 : 이사성(
李 士 星 )에게 출가- 외손자 : 이필진(
李 必進, 1610~1671)
- 외손자 : 이필진(
- 딸 : 양천허씨(
陽 川 許 氏 )
- 후처 : 정부인 선산김씨(
善 山 金 氏 ), 성암(省 菴) 김효원(金 孝 元 )의 딸 - 첩 : 김씨(
金 氏 ) - 첩 : 송성옥(
宋 成 玉 , 양민) - 송취대(宋 就大)의 딸 - 첩 : 추섬(
秋 蟾), 현응민(玄 應 旻 ) 등과 간통하였다. - 첩 : 옥매(
玉 梅 )
- 동복형 : 허봉(
- 백부 : 허구(
허균의 이복형인 허성의 사위가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의 의창군(
허준, 허자, 허잠과의 관계
[편집]허준, 허자, 허목, 허적 등은 그의 먼 친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허균의 5대조 허추(
허비의 차남 허훈(
허자는 8촌, 허준은 10촌, 허잠은 10촌으로, 10촌 이내를 친족으로 간주하고 12촌, 14촌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는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가까운 친척에 속했다.
관련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 《임진왜란》 (MBC, 1985년, 배우:김주영)
- 《회천문》 (MBC, 1986년, 배우:김주영)
- 《일지매》 (MBC, 1993년, 배우:김동현)
- 《서궁》 (KBS, 1995년, 배우:김종결)
- 《천둥소리》 (KBS, 2000년~2001년, 배우:최재성, 서상원)
- 《왕의 여자》 (SBS, 2003년~2004년, 배우:박진성)
- 《별에서 온 그대》 (SBS, 2013년~2014년, 배우:류승룡)
- 《허난설헌》 (MBC, 2014년, 배우:신담수)
- 《간서치열전》 (KBS, 2014년, 배우:안내상)
- 《왕의 얼굴》 (KBS, 2014년~2015년, 배우:임지규)
- 《화정》 (MBC, 2015년, 배우:안내상)
- 《왕이 된 남자》 (tvN, 2019년, 배우:김상경)
영화
[편집]-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년, 배우:류승룡)
저서와 작품
[편집]저서
[편집]- 《홍길동전》
- 《동국명산동천주해기(
東國 名 山洞 天 註解 記 )》 - 《도문대작(
屠 門 大 嚼)》 - 《남궁두전((
南宮 斗 傳 )》 - 《유재론》
- 《성소부부고(惺所
覆 瓿藁)》 - 《학산초담(
鶴山 樵 談 )》 - 《국조시산(
國 朝 詩 刪)》 - 《한정록(閑情
錄 )》 - 《교산시화(
蛟 山 詩話 )》 - 《성수시화(惺叟
詩話 )》 - 《을병조천록(
乙 丙 朝 天 錄 )》
평론서
[편집]- 《고시선
古詩 選 》 - 《사체성당
四 體 盛 唐 》 - 《당시선
唐詩 選 》 - 《송오가시초
宋 五 家 詩抄 》 - 《명사가시선
明 四 家 詩 選 》
소설
[편집]- 〈엄처사전〉
- 〈손곡산인전〉
- 〈장산인전〉
- 〈장생전〉
- 〈남궁선생전〉
허균문학작가상
[편집]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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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 가 나 허균:Daum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버 서 정말 율도국(
栗島 國 )을 세우려 했는가 - 한겨레[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07년05월17일 - ↑ 이이화,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 (김영사, 2009) 50페이지
- ↑ 선무원종공신 녹권
- ↑ 정삼품 통정대부(
通 政 大夫 ) 이상의 품계나 그런 품계를 올리던 일. 조선조에,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관원의 품계가 올라가다. 왕의 즉위나 왕자의 탄생과 같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 있을 때에 주로 행하였다. - ↑ 성소(惺所)
- ↑ “허균의 생애”. 허균,허난설헌선양사업회. 2016년 6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27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다음 백과사전
- ↑ 가 나 '홍길동' 쓴 허균은 음식 평론가였다 조선일보 2008년 9월 12일자
- ↑ 한국사전 48회,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 허균[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이응백·김원경·김선풍 외, 《국어국문학자료사전》(한국사전 연구사, 2002)
- ↑ 갑오경장 이전까지 홍길동전은 작자 미상, 저자 미상으로 알려져왔고, 허균이 지었을 것이라는 언급이 있었으나 의도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갑오경장 이후부터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일 것이라는 언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 허엽 위키백과 한국어
-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허균, 『성소부부고』 권15, 「문부」12, 망처 숙부인 김씨의 행장
관련 서적
[편집]- 이가원, 《유교반도 허균》(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8)
-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 이이화, 허균의 생각 (뿌리깊은 나무, 1980)
- 김동욱, 허균연구(새문사, 1981)
외부 링크
[편집]- “허균”. 《네이버캐스트》.
- 허균/허난설헌선양사업회
- 교산 허균[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류주환)
- 정말 율도국을 세우려 했는가 - 한겨레[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한국사전 48회,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 허균[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
- 허균, 홍길동을 두 번 죽이다 오마이뉴스 2008.01.31
- 허균이 성리학의 이단? 천만의 말씀! 주간동아 2006년 9월 552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