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정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종목 | 유형문화재 제25호 (1974년 1월 15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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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토지 154.1m2 |
수량 | 건물 1 |
시대 | 대한제국시대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9길 15-32 |
좌표 | 북위 37° 34′ 41″ 동경 126° 57′ 50″ / 북위 37.57806° 동경 126.96389°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황학정(
역사
[편집]황학정은 1899년 경희궁내에 건립되었다. 이때 황학정 사계가 조직되었는데, 순종 황태자가 총재가 되었고 충정공 민영환이 사계장이 되었다. 이듬해 황태자의 생일인 천추경절에 궁술경기대회를 열며 공식 개정식을 갖았다. 청-일-러 3국의 3파전에 근심하던 고종황제는 황학정에서 활을 쏘며 피로를 풀었다. 1922년[2]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경희궁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불하될 때 이를 받아 사직단 북쪽인 등과정(
황학정이 있는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한말까지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등과정은 경복궁 서편 인왕산 기슭 옥동(
1928년 황학정에서는 제1회 전조선궁술대회가 개최되었고, 함께 조선궁술연구회가 조직되었고 이는 현재 대한궁도협회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국궁이 사라져간다는 위기의식속에서 국궁 지침서인 조선의 궁술이 발간되었다.
해방 후 1947년 6월 제1회 전국궁술선수권대회가 황학정에서 개최되었고, 1948년에는 정부수립 경축 경기대회와 29회 전국체육대회 궁도부문 경기가 황학정에서 열렸다. 1958년에는 전국 남녀활쏘기대회가 처음 개최되었다.
고종황제의 어궁 '호미명 각궁'과 '전통'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시설
[편집]황학정의 활터는 전국에서 유명하였으며 광복 후에 계속 사용되었으나 6·25전쟁으로 건물도 파손되고 활쏘기도 중단되었다가 다시 중수되어 활터로 사용되고 있다. 과녁은 전방 약 145m 지점에 있으며, 1977년 일부 보수공사를 하였다.
황학정은 인왕산 동쪽 기슭 언덕 위에 동남향을 하고 자리잡았다. 정면에서 보아 4칸 중에서 동쪽 1칸은 서쪽의 3칸보다 한 단 높게 누마루를 꾸몄고, 동쪽 끝 초석은 장초석으로 처리되었다. 건물 정면 서쪽에서 2번째 칸 되는 추녀 밑에 '황학정' 현판이 걸려 있다. 북쪽 끝 1칸 양통은 온돌이며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주간 거리는 건물 정면의 서쪽에서 오른쪽으로 2,763mm, 3,051mm, 2,820mm, 2,793mm이며, 측면은 정면에서 뒤로 2,787mm, 2,820mm이다. 초석의 높이는 290mm, 장초석의 높이는 970mm이고, 대들보까지 기둥의 높이는 2,670mm이다.
건물은 외벌 장대석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동쪽 측면 기둥에는 칠언 절구의 주련(
건물 서남쪽 뒤로는 샘이 있고 그 뒤 바위에 황학정 팔경을 노래한 시를 음각하였으며, 건물 오른쪽인 동북쪽으로는 사모지붕의 한옥 한천각(
황학정 팔경
[편집]황학정 건물 서북쪽 뒤 바위에 황학정의 팔경을 노래한 시가 암각되어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백악청운(
白岳 晴 雲 ) 북악산 걷히는 구름
자각추월(紫 閣 秋月 ) 자하문 문루 가을달
모암석조(帽 巖 夕 照 ) 감투바위 석양 (감투바위는 황학정 왼쪽의 바위)
방산조휘(榜山朝 暉 ) 인왕산 바위능선 아침햇살
사단노송(社 壇 老松 ) 사직단 늙은 소나무
어구수양(御 溝 垂 楊) 청풍계 수양버들 (어구는 경복궁옆을 흐르는 개울)
금교수성(禁 橋 水聲 ) 경복궁 금청교 물소리 (금교는 청풍계 위를 지나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다리)
운대풍광(雲 臺 楓 光 ) 필운대 단풍빛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