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대한민국의 사적 | |
종목 | 사적 제124호 (1963년 1월 18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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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67,048m2 |
시대 | 조선, 대한제국 |
소유 | 국유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
좌표 | 북위 37° 33′ 57″ 동경 126° 58′ 29″ / 북위 37.56583° 동경 126.97472° |
연결 | http://www.deoksugung.go.kr/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덕수궁(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중건했으며, 1906년엔 대안문(
어원
[편집]덕수(
역사
[편집]조선 초기
[편집]현재의 덕수궁 자리에는 본래 1469년(예종 1년) 남이의 옥에 연루된 조영달(
이듬해인 1472년(성종 3년) 12월에는 성종의 생부인 의경세자 이장(
행궁 시기
[편집]월산대군이 사망한지 104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했다가 이듬해 10월 4일에 환궁한다.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된 까닭에 선조는 과거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연경궁을 고치고 주변의 여러 가옥[10]과 대지를 궁역으로 합친 뒤 임시 거처지인 시어소(
이즈음 선조가 자식들에게 내탕(內帑)을 임시로 변통하여 나눠준 뒤 이 선례에 따라 궁방전(
정릉행궁의 규모가 협소한 까닭에 선조는 창덕궁의 중건을 지시함과 동시에 주변의 민가를 매입하여 궁역에 포함시키도록 지시한다. 이 때 집 주인들에게 집값을 지불했고, 사인(
경운궁 시기
[편집]1611년 11월 15일(광해군 3년 음력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 하게 된 것은 1615년 음력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
1623년 음력 3월 서인(
그 후 영조는 1773년(영조 49년), 선조의 환도어거 180주년을 맞이하는 해의 2월 21일(음력 2월 1일) 세손(후의 정조)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
법궁이 되다
[편집]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이에 친미파 및 친러파 관료들은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카를 베베르 등과 함께 춘생문 사건을 일으킨다. 그러나 어윤중이 주모자를 채포하고 처형함에 따라 춘생문 사건은 좌절된다.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세자와 함께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벌인다. 실제로 1981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공사관의 종탑 밑에는 밀실(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은 아관파천을 멈추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한다. 고종이 이곳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는 주위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구미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운 곳이라는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본다.[23] 그러나 이어의 뜻을 보인 것과는 달리, 경운궁은 광해군이 거주한 이후 제대로 된 궁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직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아있었다. 이에 1896년 고종의 지시로 개수되기 시작했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는데, 1896년 11월 19일에 민병석을 인화문현판서사관으로 임명하는 등 1896년 경운궁을 개수할 때 인화문을 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24] 인화문은 궁의 남쪽에 위치하여 정전인 중화전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중화전의 착공은 1901년에 이루어졌으며, 완공 전까지 고종은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
경운궁은 원래 법궁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까닭에 그 입지가 매우 좁았다. 따라서 조정은 경운궁 주변의 토지를 매입해 경운궁으로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덕수궁에 영국 공사관, 미국 공사관, 독일 공사관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영역을 넓히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주변 선교사에게 연락을 취해 주택 매입의사를 밝히고 공사관의 협조를 구한 결과, 미국 공사관 주변의 선교사 주택을 매입하고 독일 공사관의 부분적 협조를 얻어내었다. 정동 여학당이 연지동으로 이전하며 선교사들도 연지동으로 많이 이사를 간 터라, 선교사 사택이 경운궁 확장영역에 포함될 수 있었다. 1899년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사택을 제외한 영역을 구입해 수옥헌을 지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토지 이외에도 조선인 민가를 매입하고 관공서를 합병시키는 방식으로도 영역을 넓힌다. 대표적으로 경운궁 북측의 세관기지와 수어청을 경운궁에 합병했다. 이런 까닭에 경운궁은 복잡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23] 이후 공사는 계속되어 선원전(璿源
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
1900년(광무 4)에는 담장 공사가 완성되었고 선원전에 불이 났으며, 봄에는 발전소의 설비가 끝나 궁내에 전기의 공급이 시작되었다. 또 이즈음에는 중화전(
1901년에는 경희궁(
1902년에는 중화전을 정전으로 하는 삼문삼조체계를 갖추고자 하였다. 중화전의 앞에 내문으로 중화문을 건설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중화문 앞에 외문을 짓고 외조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따라서 독일 공사관에 토지 구매 의사를 밝혔으나 토지를 일부 얻는 것에 그쳐, 정전과 내문에 일직선으로 외문을 설치하지 못하고 외문인 조원문(
화재 및 덕수궁 시기
[편집]국가의 재정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증축을 거듭한 덕수궁이었지만, 1904년 4월 14일 밤 10시경에 영선사(
고종은 이튿날인 15일 자책하는 내용의 조칙을 반포하며 5일간 감선(
반대측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경운궁은 중건되었다. 이 무렵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10월 21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되었으므로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
중화전은 그해 1월부터 시작하여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
1907년 7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퇴위하고 태자인 순종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융희(
순종은 그해 9월 17일 즉조당에 이어(
일제강점기
[편집]1910년(융희 4)에는 석조전(
1926년에는 창덕궁에서 순종이 사망한다. 그 후 구세군에 필지를 내어주고, 1931년에는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어 대중에 공개하자는 계획이 추진된다. 탑골공원이 협소하고 남산공원, 창경원보다 접근성이 좋다는 명목에서 공원화를 진행한 것이다.[28] 덕수궁 중화전을 둘러싼 행랑을 포함해 많은 부분이 철거된다. 돈덕전이 있던 곳에는 아동을 위한 아동공원이 만들어졌고, 광명문이 있던 곳에는 커다란 연못이 조성되었다.[29] 1933년 9월에는 덕수궁을 일반에 공개하고, 창경궁의 이왕가박물관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고자 하는 계획을 발표한다.[30] 석조전의 서측에 30만원의 금액을 들여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가미술관 건물을 1937년 8월에 기공하고 1938년 6월 5일에 개관하였다.[31] 석조전은 이왕가미술관 구관(
광복 이후
[편집]6.25전쟁 이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당시 석조전이 불타서 그 후 복구하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6.25 전쟁의 서울 수복 전투에서 인민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들어간 적도 있었다. 미군이 포격을 개시하면 덕수궁은 파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임스 딜 중위는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파괴된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예를 들며 포격을 반대했다. 이후 인민군이 을지로 방면으로 도망치자 포격을 개시하여 덕수궁은 훼손되지 않았다.[32] 제임스 딜 중위는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감사패를 수여받았다.[33]
덕수궁은 그동안 담장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목책에서 사괴석(
궁역 및 전각
[편집]덕수궁의 전체 영역은 현 덕수궁 권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덕수궁은 특히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궁궐이다.
궁문
[편집]궁궐이 처음 세워질 때 정문은 인화문이었으나 1906년에 대한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그 외에도 궁궐의 동서남북으로 여러 개의 문이 있었다.
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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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며,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다. 2021년부터 현 위치에 일제강점기 시절 훼철된 월대를 복원하는 공사에 들어갔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 |
인화문( 인화문( | |
건극문( 건극문( | |
평장문( 평장문( | |
포덕문( 포덕문( | |
생양문( 생양문( | |
회극문( 회극문( | |
집하문(輯嘏 집하문(輯嘏 | |
평성문( 평성문( | |
영성문( 영성문( |
외전
[편집]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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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 중화전( | |
중화문(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원래 좌우로 행각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헐려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던 인화문( |
내전
[편집]사진 | 설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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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浚眀 준명당(浚眀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덕혜옹주 유치원 생 시절 (5살) 준명당에 고종은 유치원을 만들어 덕혜옹주를 즐겁게 해 주었다. | ||
즉조당( 즉조당(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 | ||
석어당( 석어당( 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았다. | ||
함녕전(咸寧 함녕전(咸寧 고종(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 | ||
정관헌( 정관헌( |
근대식 구법 적용[37] | |
석조전( 석조전(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정면 54m, 너비 31m의 3층 석조 건물로 지어졌다. 그리스 건축을 조형( |
근대식 구법 적용[37] | |
경운궁 돈덕전 사바찐이 설계하여 1902년 준공되었다. 벽돌조+목조바닥의 근대식 구법 건물이었으며 소실되었다.[37] 2023년 준공된 현대 건축물 돈덕전 지하에 유구 유적으로 남아있다. |
멸실 근대식 구법 적용[37] |
일제강점기 및 현대 건축 영역
[편집]사진 | 설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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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 및 귀빈대합실[37]( 일제강점기 조선의 이왕직 영건조직이 한식목구조+양식트러스 구법으로 설계하였으며, 1912년 준공되었다.[37]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함녕전 서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용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 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
근대식 구법 적용[37] | |
조선고미술진열관[37] 일제강점기 조선 당시 나카무라 요시헤이( 통칭 석조전 서관으로 불리며, 일제강점기 이왕가미술관으로 쓰였다. 광복 이후 1973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하였고,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정식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 이전에도 사용되어 오던 ‘덕수궁미술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면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
근대식 구법 적용[37] | |
돈덕전 돈덕전( |
* 멸실 (조선시대 건축물) * 2023년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현대식 건축물로 재건 |
선원전 영역
[편집]선원전(璿源殿 )
[편집]덕수궁 선원전은 1897년경 원래 포덕문 안쪽(현 함녕전 우측)에 건립되었으나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된다. 이후 1901년경 영성문 안쪽의 자리에 복구한 후 사용되다가, 일제 강점기인 1920년경 헐린 뒤 의효전과 함께 창덕궁으로 이전되어 신선원전을 짓는데 활용된다.
흥덕전(興 德 殿 )
[편집]흥덕전은 고종대에 건립된 건물로, 덕수궁 선원전의 화재로 소실된 어진을 복원하기 위해 각 지역의 어진을 이안(다른 곳으로 옮겨 모시는 것)하고 모사(어떤 그림의 본을 떠서 똑같이 그리는 것)하는 이안청의 역할을 수행하고 효정왕후, 순명효황후, 순헌황귀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공간이다.[39]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20년경 철거되었다. 문화재청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발굴조사와 각종 자료를 비교 분석한 결과, 복도각, 행각과 삼문 등 각종 건물 배치를 파악했고, 2022년 11월부터 복원 공사에 들어가서 2027년까지 흥덕전 권역의 복원을 마치면 대한제국기 왕실 제례 의식을 재현하고, 국장과 관련한 전시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계획이다.
흥복전(興福 殿 )
[편집]흥복전은 고종대에 건립된 건물이며, 경복궁 회안전을 이전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4년 효정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20년경 철거되었다.
의효전(懿孝殿 )
[편집]의효전은 고종대에 건립된 건물이며, 경복궁 문경전을 이전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부터 순명효왕후의 혼전 의례를 시행하였다. 고종이 별세한 뒤인 1921년에 다시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창덕궁 신선원전 영역에 이름이 같은 전각이 남아있다.
홍원 영역
[편집]양이재
[편집]정관헌 너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옆에는 예전에 황실 교육기관으로 쓰이던 양이재가 있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함희당
[편집]수학원
[편집]중명전 영역
[편집]사진 | 설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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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중명전( |
근대식 구법 적용[37] | |
환벽정 | 멸실 | |
수풍당 | 멸실 | |
흠문각 | 멸실 | |
만희당 | 멸실 | |
강태실 | 멸실 | |
정이재 | 멸실 |
내전 영역
[편집]영복당
[편집]구여당
[편집]구성헌
[편집]함유재
[편집]태후전 영역
[편집]수인당
[편집]사성당(思 成 堂 )
[편집]기타 전각
[편집]기타 유물
[편집]- 광명문에는 흥천사명 동종과 국보 229호인 보루각 자격루(
自 擊 漏 )가 전시되어 있었으나, 광명문의 이전 복원과 함께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40] 이 자격루는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을 중종 29년(1536년)에 보완한 것이었다. 신기전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이름에 대한 논란
[편집]2011년 4월 한 시민에 의해 "덕수궁의 본래 이름인 경운궁 명칭을 회복해야 한다."라는 민원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에서는 3차례 공청회를 개최하였는데, 원광대학교 이민원 교수 등은 덕수궁 명칭을 유지해야한다고 본 반면 명지대학교 홍순민 교수 등은 경운궁으로 환원할 것을 주장했다. 덕수궁 명칭 유지 측은 “100여 년 이상 사용되어 이미 사회적으로 정착된 명칭이므로 이를 바꿀 경우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커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현행대로 유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경운궁 명칭 유지측은 경운궁이 “1611년부터 300여년 간 사용되어온 역사적인 명칭이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가 경운궁으로 돌아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명실상부한 법궁이었으나, 1907년 궁궐명칭이 덕수궁으로 개칭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력에 의하여 고종이 황제위를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전 황제의 거처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원 명칭으로 회복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41]
최종적으로 문화재청은 2011년 12월 14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회의에서 덕수궁 명칭 변경 문제를 심의한 결과 경운궁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은 만큼 명칭 변경 안건 심의 자체를 '보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 문화재위원회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덕수궁에 대한 광범위한 학술 연구 등을 거쳐 추후에 명칭 변경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42]
교통
[편집]- ● 수도권 전철 1호선, ●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서울)|시청역]
사진
[편집]-
석어당에서 덕홍전으로 향하는 문
-
석어당에서 바라본 덕홍전
-
유현문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글로벌 세계대백과》〈덕수궁〉
-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2009, p.311
- ↑ “국가문화유산포털 > 덕수궁 소개”. 2022년 12월 8일에 확인함.
- ↑ “우리역사넷”. 2022년 12월 10일에 확인함.
- ↑ 《정종실록》 4권, 정종 2년 6월 1일 갑오 1번째기사
- ↑ 《성종실록》 2권, 성종 1년 1월 30일 기유 4번째기사
- ↑ 《성종실록》 11권, 성종 2년 7월 24일 을미 2번째기사
- ↑ 《성종실록》 25권, 성종 3년 12월 2일 갑자 3번째기사
- ↑ 《성종실록》 60권, 성종 6년 10월 28일 갑진 4번째기사
- ↑ 선조의 외척이자 명종의 처가였던 영상 심연원의 가옥을 종묘로 삼고,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가옥을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삼았다.
- ↑
李 廷龜. (1636). 월사집(月 沙 集 )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小田 省吾 (1938). 《徳寿 宮 史 》. - ↑ 《선조실록》 158권, 선조 36년 1월 13일 경오 3번째기사
- ↑ “문화재청”. 2022년 12월 10일에 확인함.
- ↑ 광해군일기 46권 신해년 10월 11일 조.
- ↑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7월 12일 경자 3번째기사
- ↑ 1896년 8월 26일자 독립신문
- ↑ 안현희, 아관파천, 옛 러시아공사관 3층탑[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뉴스한국
- ↑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1일 양력 1번째기사
- ↑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6일 양력 1번째기사
- ↑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5월 16일 양력 1번째기사
- ↑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9월 4일 양력 1번째기사
- ↑ 가 나 다 라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문화재청. 2010.
- ↑ 대한제국 관보 제0488호,
建 陽 元年 十 一 月 廿 三 日 月曜 (1896년 11월 23일) - ↑ 《고종실록》 고종 34년 10월 7일 (양력)
- ↑ 《중화전영건도감의궤》 〈조칙〉, "
中和 殿 外 三 門 門 號 朝 元 " - ↑ 이혜민. “서울 정동의 도시조직변화연구 : 덕수궁 영역의 필지변화를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 ↑ “
德壽 宮 一 萬 餘 坪 에大 公園 建設 計 劃”. 조선일보. 1931년 5월 16일. - ↑ “사라진
過去 의回想 터로今秋 에公開 할德壽 宮 ”. 동아일보. 1933년 2월 12일. - ↑ “
古 畵陳列 의目的 變更 ”. 조선일보. 1933년 9월 17일. - ↑ “
李 王家 美術 舘 ”. 동아일보. 1936년 4월 15일. - ↑ “사라질 뻔한 덕수궁”. 2005년 4월 29일. 2022년 12월 10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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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편집]- 《문화유적총람》, 문화재관리국, 1977
- 덕수궁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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