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영
장용영(
1777년 정조가 국왕에 즉위한지 1년만에 국왕 암살 미수사건이었던 ‘존현각 적변(
역사
[편집]정조 암살 미수사건이었던 ‘존현각 적변(
무예출신청
[편집]'무예출신청(
무예출신 30명은 각각 15명씩 2개의 번으로 나누어졌고, 각 번 마다 1명의 패두(
무예출신청의 군병과 행정 조직은 모두 훈련도감을 모태로 형식한 것이었다. 이러한 무예출신청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궁궐에 입직하여 숙위하는 것이었다. 무예출신청 소속 군병들의 입직처는 아래와 같다.
- 명정전 서쪽 회랑: 패두 1명, 소임 1명, 무예출신 10명이 2번으로 나누어 입직[2]
- 홍화문: 무예출신 1명이 군병 5명을 거느리고 입직[3]
- 합문(
閤 門 ) 밖 공해(公 廨): 무예출신의 영솔(領 率 )을 받아서 별기군 8명이 3번으로 번소(番所 )에 입직[4]
이외의 무예출신청의 또 다른 업무는 국왕을 호위하는 '호위(扈衛)'와 화재 진압 업무인 '금화(
하지만 이후 정조 9년 6월 정조가 '무예출신'이라는 말이 애매하다고 지적한다. 당시 무예출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예별감 중에서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거나 과거 급제 출신이어야 했다. '출신'이라는 단어는 본래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만 붙는 칭호인데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아닌 ‘무예별감 중에서 무예가 출중한 사람’에게도 칭호가 붙었기 때문에 정조가 문제 삼은 것이다. 이에 새로운 이름이 제안되는데 최종적으로 제안된 이름은 ‘친군위(
장용청
[편집]무예출신청에서 장용청으로 변경된 후에도 운영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운영상의 변화가 생긴 것은 정조 11년 중반 무렵부터였다. 정조 8년부터 10년까지 일어난 연이은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정파 내부의 다양한 분화 양상이 촉진되었고, 이는 정조대 전반 형성된 정치 세력을 재편하는 중대한 계기로 작용했다. 이때 훈련대장이었던 구선복 역시 제거되어 장용청의 주도권을 정조가 장악하게 된다. 이후 장용청과 관련된 변화로는 선혜청당상 서유린이 본격적으로 장용청 재정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장용청의 청사가 건립되었다는 것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장용청이 본격적으로 훈련도감에서 벗어나 독자성을 갖춘 군영아문으로 성장하기 위한 일종의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후 장용청 내에 호방(
장용청 운영 체제의 두 번째 특징은 이전과는 달리 마군(
무예출신청과 장용청의 차이점은 먼저 훈련도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과 장용위 중심의 궁궐 숙위군 뿐만 아니라 호위군으로 가능한 마군과 보군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장용영
[편집]초기에는 장용위(
장용영 체제
[편집]장용영으로의 체제 변화 및 향군의 확보
[편집]명칭이 바뀐 장용영은 기존 군영의 군역 자원을 이속 받아 장용영에서 직접 군병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장용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군병들은 새로 선발했는데, 장용영으로 명칭이 바뀌어 불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중앙 군영의 군병들 이속받았다. 더하여 장용영에 월과미(
장용영 운영체제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두 번째 계기는 향군(鄕軍)의 확보였다. 정조 12년 7월 경기도 가평군의 축령산 아래 방동리의 둔토가 장용영의 둔전으로 이속되었는데, 이 둔토는 호조에서 공세(
당시까지 장용영에서 확보한 군병은 모두 한성부에 거주하는 군병이었으므로 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향군은 없었다. 그러므로 구군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향군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장용영 향군은 지평, 양근, 가평, 파주에 거주하는 수어청 군병을 이속받아 마련했다. 장용영이 향군을 확보하는 조치에 따른 부담을 정조는 '장용영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가 해당 읍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는 명분 강조하며 해결하고자 했다. 장용영은 상번(
장용영의 위상 강화
[편집]시간이 지날수록 장용영의 규모와 역할, 기능은 점차 확대하고 있었으나 문제는 ‘위상’이었다. 정조 12년 3월 6일 장용영 병방 이한풍이 체차(遞差)를 청하는 상소에 대한 정조의 비답을 보면 ‘별것도 아닌 영고(營校)가 비록 해영의 당상 장관에 대해서도 오히려 감히 이와 같이 무엄하게 굴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본영의 병방 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나와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어떠한 일로 장용영 병방이 무시를 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이를 몇가지 전례를 들어 설득하려 했는데, 첫째는 승정원 병방이 병조를 호위하듯, 장용영 병방도 그와 같은 위상을 지니면 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위차(
장용영의 무예 훈련
[편집]장용영 상번 향군의 경우는 화성 방위에 직결된 부대로 가장 많은 훈련의 내용이 시방과 포진이라고 하여 각종 포에 대한 방포술 훈련과 화포들을 이동시켜 진을 구축하는 훈련을 매월 3일마다 진행하였다. 또한, 조총의 경우도 대비교의 형태로 유엽전과 함께 시험을 치뤄 지속적으로 훈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경군과 향군 모두 보병의 경우는 사습시에 조총을 발사하여 6개를 적중하면 경군은 무명 1필, 향군은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는 등 조총실력 향상을 위해 많은 시상을 하였다. 장관이나 장교를 비롯한 지휘관 뿐만 아니라 보병들이 가장 많이 익혔던 활쏘기의 경우는 수시로 시사나 중순 등 다양한 형태로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
기병의 경우도 지상에서 활을 쏘는 보사 형태의 유엽전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 형태인 기추를 비롯한 활쏘기 시험을 기본으로 하고, 별도로 기별들이 근접전투를 펼칠 때 활용하는 마상무예의 일종인 마상월도와 마상쌍검을 시험 보았다. 또한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 기창의 경우는 교전의 형태로 진행하였으며, 달리는 말 위에서 좌우르 넘나드는 초마나 말의 옆구리에 붙어 달리는 등리장신 등의 다양한 변형 동작을 익히기 위해 마상재를 훈련했다.
보군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화약무기인 조총을 기본으로 익히며, 무기술을 배우기 전에 수족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맨손무예의 일종인 권법을 시험 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특별히 매 초의 45명이 검을 가지고 맞서 싸우는 교전을 하고, 조선세법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까지 잘 알려진 조선검법의 일종인 예도와 본국검(신검)을 수련했다. 또한 날의 형태가 한쪽으로 베어지는 도의 형태를 취하면서 창과 같이 자루가 긴 협도를 함께 수련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장용영의 기병과 보병의 단병접전을 위한 개인무예 훈련은 1790년(정조 14년)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병서는 앞서 간행한 진법서인 [병학통]과 씨줄과 날줄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병서로 장용영의 단독군영체제가 확립되면서 모든 군사들의 군사무예를 통일화시키는 핵심적인 개인 무예서였다. 이 병서에는 기병과 보병을 위한 모두 24가지의 무예가 실려 있는데, 이 중 보병들이 익히는 십팔반 혹은 십팔기는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시 간행했던 [무예신보]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 것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추가된 마상무예 6가지는 정조대 기병전술 강화를 위하여 추가한 것으로 [병학통]에서 다른 병서와는 다르게 마병학익진이나 마병봉둔진을 비롯한 기병단독 진법을 추가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이러한 [무예도보통지]를 통한 무예훈련은 장용외영이 주둔한 화성을 중심으로 가장 활발하게 보급되었다. 대표적으로 화성 방위군 역할을 담당했던 장용외영의 [보군유방절목]을 보면, '자체 훈련은 날마다 실시하되 첫 날과 마지막 날은 훈련장에서 하는 규정과 똑같이 연습하고 중간 날에는 십팔반무예를 [무예도보통지]에 의거하여 가르치고 시험을 보인다.'라고 하였다. 또한 입번한지 11일째가 되는 날이면 쏘기와 화포쏘기를 병행하여 성곽 위에서 원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군사훈련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기병의 경우는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무에 이외에 말을 타고 짚 인형에 활을 쏘는 기추와 짚 인형을 편곤으로 공격하는 편추를 비롯하여 조총훈련까지 병행하여 수성군으로써의 디병전술 활용도를 높였다.
또한 장용외영의 경우는 화성방어를 위해 장용내영의 군사들과 함께 성조 중 주조와 야조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1795년(정조 19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총 8일간 진행된 정조의 원행기록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화성성조를 기록하고 있다. 야간에 성곽을 지키는 훈련에서는 매복병을 성곽 여기저기에 배치하고 이후 다양한 신호체계와 함께 섶과 오색쌍등을 켜거나 끄는 방식의 훈련이 진행되었다. 특히 훈련은 군사들만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화성 성곽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민가들이 동참하여 함께 성곽을 방어하는 훈련을 진행하였다. 이는 수성전이 발생할 경우 군사들만으로 성곽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까지 총동원되기에 이를 미리 대비하는 일종의 민관군 합동군사훈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5]
장용영 폐지
[편집]장용영을 적극 지지하고 활용했던 정조가 승하하자 장용영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정조 승하 이후 순조의 장인 김조순, 외조부 박준원이 장용대장을 맡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용영을 해체하고 그 막대한 재정을 활용하자는 논의가 대세가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정세로 인해 장용영은 결국 1802년에 대왕 대비였던 정순왕후 김씨의 명에 따라 폐지되었다. 화성의 방어를 위해 수원에 주둔하던 장용외영은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총리영(摠理營)으로 개편된다. 화성 역시 자연스레 정조 대에 비해 위상이 약화되었다.
관직
[편집]- 내영(內營): 한성부 소재
- 장용사(
壯 勇 使 ) 1명[6] - 제조(
提 調 ) 1명 - 종사관(
從事 官 ) 1명 - 별장(
別 將 ) 1명 - 파총(
把 摠) - 선기장(
善 騎 將 ) - 초관(哨官)
- 장용사(
- 외영(
外 營): 수원(水原 ) 소재- 장용외사(
壯 勇 外 使 ) 1명: 수원유수 겸임
- 장용외사(
편성
[편집]- 내영(內營)
- 친병(
親 兵 ) 1사(司 ) 5초(哨)[7] - 향군(鄕軍) 4사 20초
- 친병(
- 외영(
外 營)- 별효사(
別 驍士) 2초(哨) - 마병(
馬 兵 ) 4초 - 속오군(
束 伍 軍 ) 26초 - 표하군(
標 下 軍 ) 547명 - 치중군(
輜重 軍 ) 200명
- 별효사(
- 독성산성(
禿 城山 城 )[8]- 장초(
壯 抄 ) 2초(哨) - 아병(
牙 兵 ) 1초 - 둔장초(
屯 壯 抄 ) 68명 - 군수보(
軍需 保 ) 125명
- 장초(
같이 보기
[편집]참고문헌
[편집]- 박범, 정조 중반 장용영의 군영화 과정, 수선사학회, 2019.01
- 최학삼, 조선시대 훈련도감과 기타 중앙군영 및 장용영의 재정조달과 관한 연구, 한국조세연구포럼, 2016.04
- 김준혁,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더봄, 2018.01
- 최형국, 정조의 무예사상과 장용영, 경인문화사, 2015.11
각주
[편집]- ↑ 박, 범 (2019). “정조 중반 장용영의 군영화 과정”. 《수선사학회》. 2013년 8월 12일에 원본 문서
|url=
값 확인 필요 (도움말)에서 보존된 문서. 2023년 12월 26일에 확인함. - ↑ 〈무예출신청절목 1조〉. 《훈국등록 34책》. 정조 6년 12월 30일.
- ↑ 《승정원일기 1562책,》. 정조 8년 7월 13일.
- ↑ 〈무예출신청절목 4조, 5조〉. 《훈국등록 34책》. 정조 6년 12월 30일.
- ↑ 최, 형국 (2015년 11월 16일). 《정조의 무예사상과 장용영》. 경인문화사. 70-77쪽.
- ↑ 1793년 〈절목〉(
節目 , 법령)에서는 장용내사(壯 勇 內使)라고 정하고 장용대장(壯 勇 大將 )라고 불렀다. - ↑ 초(哨)는 조선시대 부대 단위이다. 오늘날의 중대급 규모이며, 약 100~120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사(
司 )는 여러 개의 초로 편성한 상급 부대이다. 즉, 친병 1개 사는 5개 초(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 ↑ 예전 수원, 현재 오산에 있는 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