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lated by https://www.hiragana.jp/)
신라 6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본문으로 이동

신라 6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한 6부에서 넘어옴)

신라 6부(しん ろく)는 신라에 있었던 6개의 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한 6촌이 그 기원이라 전하며, 사로국을 이루었다 하여 사로 6촌이라고도 한다. 현재 한반도 동남쪽에 있었던 부족연맹체 진한에서 신라의 기반이 된 서라벌의 여섯 부락이며, 씨족 집단으로 육촌(ろくむら) 또는 육부촌(六部ろくぶむら)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살며 생겨났다고 하였다.[1] 유리 이사금이 서기 32년에 각 촌(むら)을 부()로 바꾸었다고 전한다.[2]

신라 6부는 이후 신라의 국정운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으며, 6부 바깥의 이들을 노인(やつじん)이라 하기도 하였다. 6부소감전(ろくしょうかんてん)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행정 업무를 맡았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며 고려에서는 신라 6부를 경주 6부로 바꾸었다.

개요

[편집]
사로 6촌 알천 양산촌

<閼川 楊山むら>

돌산 고허촌

<突山 だか墟村>

취산 진지촌

<くちばしやま ちんささえむら>

무산 대수촌

<茂山しげやま 大樹だいきむら>

금산 가리촌

<金山かなやま とぎむら>

명활산 고야촌

<あきらかつやま だか耶村>

열거 순서

(삼국사기)[3]

1 2 3 4 5 6
열거 순서

(삼국유사)

1 2 4 3 5 6
6부 (문헌)[2] (급)양부<(及)はり> 사량부<すなはり> 본피부<ほんかれ> 모량부<牟梁>

점량부<ややはり>

한기부<かん祇部> 습비부<習比>
6부 (금석문) 훼부<喙部> 사훼부<すな喙部> 본피부<ほんかれ>

본파훼(부)<ほんなみ喙>

모훼부<牟喙>

잠훼부<岑喙>

모단벌훼(부)<牟旦喙>

한지부<かんただ>

한지벌부<かんただ>

사피부<斯彼>
성씨 (삼국사기) 이<> 최<ちぇ> 정<てい> 손<まご> 배<裵> 설<薛>
성씨 (삼국유사) 이<> 정<てい> 최<ちぇ> 손<まご> 배<裵> 설<薛>
촌장 알평<謁平> 소벌도리<みやことし> 지백호<さとしはくとら> 구례마<俱禮> 지타<祗沱> 호진<とらめずらし>
강림 위치 표암봉<ひさご嵓峰> 형산<あにやま> 화산<花山はなやま> 이산<伊山いやま> 명활산<あきらかつやま> 금강산<金剛山こんごうさん>
경주6부 중흥부<中興部なかおこっぺ> 남산부<南山なんざん> 통선부<どおりせん> 장복부<長福ながふく> 가덕부<とく> 임천부<臨川りんせん>
삼국유사 기이 어머니 아버지

일찍이 진한 땅에 골짜기마다 조선의 유민들이 흩어져 살았는데, 6촌이 있었다. 6촌의 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맞아 '사로(斯盧)'의 왕으로 받들어 진한 12소국의 하나인 사로 6촌이 되고, 점차 신라 6부로 발전하였다. 이들이 나중에 그 공으로 각기의 성(せい)을 받아 신라 6성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경주 6부로 개편되었다.

사로 6촌의 촌장들은 처음 표암봉(ひさご嵒峰)에 내려온 알천 양산촌장 알평(謁平), 형산(あにさん)에 내려온 고허촌장 소벌도리[4](みやことし), 화산(花山はなやま)에 내려온 진지촌장 지백호(さとしはくとら), 이산(伊山いやま)에 내려온 대수촌장 구례마(俱禮), 명활산(あきらかつさん)에 내려온 가리촌장 지타(祉陀), 금강산(金剛山こんごうざん)에 내려온 고야촌장 호진(とらめずらし, 설거백)을 말한다.

사로 6촌

[편집]
이보다 앞서 조선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6촌을 이루었으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알천 양산촌

[편집]

알천[5] 양산촌의 남쪽은 고려시대의 담엄사이다. 고려시대의 파잠(なみせん)·동산(東山ひがしやま)·피상(かれじょう)·동촌(東村あずまむら)이 여기에 속한다.[6]

  • 경주시 동방(東方とうほう), 인왕(ひとし旺), 구황(きゅう), 노동(みちひがし), 노서(みち西にし), 동부(東部とうぶ), 성동(城東じょうとう), 성건동(しろいぬいほら) 일대.

돌산 고허촌

[편집]

고려시대의 구량벌(かたき) · 마등오(あさとうがらす) · 도북(道北みちきた)· 회덕(まわりとく) 등 남촌(南村なんそん)이 여기에 속한다.[7]

  • 경주시 배동(はいほら), 내남면 덕천리, 울주군 두서(西にし), 두동면(東面とうめん) 일대.

취산 진지촌

[편집]

진지(또는 빈지, 빈자, 영지)촌이다. 고려시대의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8]

  • 경주시 진현동(すすむ峴洞), 외동읍(そとひがし邑) 일대.

무산 대수촌

[편집]

무산[9] 대수촌[10]은 고려시대의 박곡촌(朴谷ほうのきだにむら) 등 서촌(西村にしむら)[11]이 여기에 속한다.[12]

  • 경주시 현곡면(たにめん) 일대.

금산 가리촌

[편집]

고려시대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 고려시대의 상ㆍ하서지(上下じょうげ西にし) · 내아(乃兒) 등 동촌(東村あずまむら)이 여기에 속한다.[13]

  • 경주시 감포읍(あまうら邑) 양남(陽南ようなん). 양북면(北面ほくめん) 일대.

명활산 고야촌

[편집]

고려시대의 물이촌(勿伊むら) ·잉구미촌(仍仇旀村) · 궐곡(閼谷, 또는 갈곡(葛谷くずや)) 등 동북촌(東北とうほくむら)이 여기에 속한다.[14]

  • 경주시 천북면(川北かわきためん) 화산(花山はなやま), 물천(勿川) 동산리(東山ひがしやまさと) 일대.

신라 6부

[편집]

사로가 신라로 발전하면서 6촌은 6부로 자리잡았다.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은 왕경 내에 있었고,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은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왕경 내의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이 세력이 컸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초기에는 양산촌이 중추로 있다가 6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양산촌인 양부와 고허촌인 사량부와 진지촌인 본피부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18][19]

금석문에 나타나는 6부명과 그에 대한 대응은 이렇다. 1차사료인 금석문에서 훼(喙) 글자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량(はり)이라 적혔다.

  1. 훼부<喙部> = 양부<はり>
  2. 사훼부<すな喙部> = 사량부<すなはり>
  3. 본피부<ほんかれ>, 본파훼<ほんなみ喙> = 본피부<ほんかれ>
  4. 잠훼부<岑喙>, 모훼부<牟喙>, 모단벌훼<牟旦喙> = 모량부<牟梁>, 점량부<ややはり>
  5. 한지부<かんただ>, 한지벌부<かんただ> = 한기부<かん祇部>
  6. 사피부<斯彼> = 습비부<習比>

신라 6성

[편집]

서기 32년(유리왕 9) 6부의 후손들이 알평이씨(), 소벌도리최씨(ちぇ), 지백호정씨(てい), 구례마손씨(まご), 지타배씨(裵氏), 호진설씨(薛氏)를 성씨(姓氏せいし)로 받아[20] 각 성씨의 시조가 되었고, 뒤에 후손들이 모두 계림(にわとりりん, 경주)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21]

왕성(おうせい)인 박씨(ぼく), 석씨(むかし), 김씨(きむ)와 함께 신라 토성(せい)으로 인식된다.[22]

경주 6부

[편집]

고려가 통일한 뒤인 940년(고려태조 23)에 '경주'(慶州けいしゅう)라는 이름과 함께 급량부는 중흥부(中興なかおき), 사량부는 남산부(南山なんざん), 본피부는 통선부(つうせん), 점량부는 장복부(長福ながふく), 한기부는 가덕부(とく), 습비부는 임천부(臨川りんせん)로 개편되었다.

각주

[편집]
  1.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じょうさき あさ鮮遺みん ぶんきょ山谷さんやあいだためろくむら”(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다.)
  2. 양산부를 양부라~:《삼국사기》(신라본기 제1권, 유리 이사금 じょう) きゅうねん はる あらためろくめい 仍賜せい 楊山ためはり せい だか墟部ためすなはり せいちぇ 大樹だいきためややはり いちうん牟梁 せいまご ちん爲本ためもとかれ せいてい 利部かがぶためかん せいあかりかつため習比 せい
  3.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じょういち曰閼川楊かわやなぎ山村さんそん 二曰突山高墟村 さん曰 觜山ちんささえむら あるうんちんむらよん茂山しげやま大樹だいきむら 金山かなやま ” “첫째는 알천양산촌이고, 둘째는 돌산고허촌, 셋째는 취산진지촌 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대수촌, 다섯째는 금산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4. 당시 6부의 촌장들 중 소벌도리가 가장 연장자였던 것으로 전해온다.
  5. 다른 촌은 모두 산 밑에 있는데, 양산촌만 알천이라는 물가에 있어 살기도 가장 좋고 인구도 많아 중추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じょう “一曰閼川楊山村南今曇嚴寺長曰謁平初降于瓢嵓峯 ため及梁やつれいおうきゅうねんおけめい及梁夲朝ふとし天福てんぷく五年庚子改名中興部波潛東山彼上東村屬焉 ”(첫째는 알천양산촌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이다. 촌장을 알평이라 일컬으며 처음에 표암봉에 내려왔으니, 이가 곧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서기 32년)에 급량부라는 이름의 부()를 두었는데 본조(本朝ほんちょう)의 태조 천복(天福てんぷく) 5년 경자년(かのえねん, 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なかおこっぺ)라 하였다. 파잠(なみせん)·동산(東山ひがしやま)·피상(かれじょう)·동촌(東村あずまむら)이 여기에 속한다.)
  7.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じょう曰 突山だか墟村ちょう曰蘇みやことしはつくだ于兄やまためすなはりりょう 讀云どうあるさく涿亦おんどうていこん曰南山部やまべかたきあさとうがらす道北みちきた迴徳とう南村みなみむらぞくたたえこん曰者 ふとし しょおけ也下れい”(둘째는 돌산고허촌이니 촌장을 소벌도리라 일컫으며,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사도부はり’을 ‘도’로 읽는다. 또는 ‘涿’이라 쓰지만 역시 음(おと)은 ‘도’이다.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なんざん)라 일컫는데 구량벌 · 마등오 · 도북· 회덕 등 남촌(南村なんそん)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라 일컫는다’고 하는 것은 태조가 설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8.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じょう “四曰觜山珎支村一作賔之又賔子又氷之ちょう曰智はくとらはつくだ花山はなやまため夲彼ちぇこん曰通せんしばともみとう東南とうなんむらぞく焉”넷째는 취산진지촌빈지, 빈자 또는 영지라고도 한다이니, 촌장을 지백호라 일컫는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왔으니, 이는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라 일컫는데, 시파(しばともみ)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9. 무산이라는 명칭은 지금도 건천읍 일대 곳곳에 남아 있다.
  10. 건천읍 일대로 지금도 대수촌이라 부른다.
  11. 조선시대에 경주부일 때 서면이라 했고, 건천면으로 있다가 지금은 건천읍이 되었다.
  12.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じょう “三曰茂山大樹村長曰俱 いちさくかたきれいはつくだ于伊やまいちさくみな比山ひやまこれためややはりいちさく涿また牟梁まごこんうんちょう福部ふくべ朴谷ほうのきだにむらとう西村にしむらぞく焉”(셋째는 무산대수촌이니 촌장을 구례마(俱禮 또는 かたきれい)라 일컫는다. 처음에 이산(伊山いやま, 개비산(みな比山ひやま)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는 점량부(ややはり 또는 やや涿部)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 일컫는데, 박곡촌 등 서촌(西村にしむら)이 여기에 속한다.)
  13.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じょう “五曰金山加里村こん金剛山こんごうさんかしわ栗寺くりでら北山きたやまちょう曰祗沱いちさくただほかはつくだ于明かつやまためかん歧部またさくかん歧部裴氏こんうんとく上下じょうげ西にし乃兒とう東村ひがしむらぞく焉”(다섯째는 금산가리촌지금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이니, 촌장을 기타지타라고도 한다라 일컫는다. 처음에 명활산으로 내려왔으니, 한기부(かん歧部 또는 か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라 일컫는데, 상하서지 · 내아 등 동촌(東村あずまむら)이 여기에 속한다.)
  14.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じょうろくあかり佸山 髙耶むら ちょうとらはつくだ金剛山こんごうさん ため習比薛氏いま臨川りんせん 勿伊むら 仍仇旀村 闕谷いちさく 葛谷くずや とう東北とうほくむらぞく焉”(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촌장을 호진이라 일컫는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으니,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인데, 물이촌 ·잉구미촌 · 궐곡갈곡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とうほくむら)이 여기에 속한다.)
  15. 최치원의 출신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데, 《경상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대부분 《삼국사기》를 따라 사량부라 한다.
  16. 지금도 모량리가 있다.
  17. 조부 때 이후 출경하여 경산현 불지촌(ふつむら) 율곡(栗谷くり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8. 대한민국 성씨 구성에서도 양산촌의 이씨, 고허촌의 최씨, 진지촌의 정씨가 5대성에 들어간다.
  19. 신라가 고대국가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권력 중심에서 차츰 밀려난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 사람들이 밀양, 성산, 경산 등지로 이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진지촌 사람들도 영일, 동래 등지로 산거하게 된다.
  20. 유리이사금(재위: 24년~57년) 때라고 하나 당시 성이 별 필요가 없던 시기이므로 실제로 사성을 받은 것은 훨씬 뒤일 것이다.
  21.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삼국사기와 달리 고허촌에서 정씨가, 진지촌에서 최씨가 나왔다고 했다. 일연은 최치원도 본피부 사람이라 했는데, 이는 착오인 듯 하다.
  22. 대한민국 인구의 54%를 차지하는 대성인 김, 이, 박, 최, 정이 모두 신라 9성(せい) 안에 들어있다.

같이 보기

[편집]
사로 6촌 (斯盧ろくむら)
알천양산촌
(閼川楊かわやなぎ山村さんそん)
돌산고허촌
(突山だか墟村)
자산진지촌
(觜山ちんささえむら)
무산대수촌
(茂山しげやま大樹だいきむら)
금산가리촌
(金山かなやまとぎむら)
명활산고야촌
(あきらかつ山高やまたか耶村)
6부명
(6めい)
급량부
及梁
사량부
すなはり
본피부
ほんかれ
점량부
ややはり
한지부
かん祗部
습비부
習比
촌장
(村長そんちょう)
알평
謁平
소벌도리
みやことし
지백호
さとしはくとら
구례마
俱禮
지타
祗陀
호진
とらめずらし
강림지
(降臨こうりん)
표암봉
ひさごいわおほう
형산
あにやま
화산
花山はなやま
이산
伊山いやま
명활산
あかりかつやま
금강산
金剛山こんごうざん
후손 성씨
(こうまご 姓氏せいし)
이씨
최씨 · 소씨
ちぇ ·
정씨
てい
손씨
まご
배씨
裵氏
설씨
薛氏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