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6부
신라 6부(
신라 6부는 이후 신라의 국정운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으며, 6부 바깥의 이들을 노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며 고려에서는 신라 6부를 경주 6부로 바꾸었다.
개요
[편집]사로 6촌 | 알천 양산촌
<閼川 楊山 |
돌산 고허촌
<突山 |
취산 진지촌
< |
무산 대수촌
< |
금산 가리촌
< |
명활산 고야촌
< |
---|---|---|---|---|---|---|
열거 순서
(삼국사기)[3] |
1 | 2 | 3 | 4 | 5 | 6 |
열거 순서
(삼국유사) |
1 | 2 | 4 | 3 | 5 | 6 |
6부 (문헌)[2] | (급)양부<(及) |
사량부< |
본피부< |
모량부<牟梁 점량부< |
한기부< |
습비부<習比 |
6부 (금석문) | 훼부<喙部> | 사훼부< |
본피부< 본파훼(부)< |
모훼부<牟喙 잠훼부<岑喙 모단벌훼(부)<牟旦 |
한지부< 한지벌부< |
사피부<斯彼 |
성씨 (삼국사기) | 이< |
최< |
정< |
손< |
배<裵> | 설<薛> |
성씨 (삼국유사) | 이< |
정< |
최< |
손< |
배<裵> | 설<薛> |
촌장 | 알평<謁平> | 소벌도리< |
지백호< |
구례마<俱禮 |
지타<祗沱> | 호진< |
강림 위치 | 표암봉< |
형산< |
화산< |
이산< |
명활산< |
금강산< |
경주6부 | 중흥부< |
남산부< |
통선부< |
장복부< |
가덕부< |
임천부< |
삼국유사 기이 | 어머니 | 아버지 | 딸 |
일찍이 진한 땅에 골짜기마다 조선의 유민들이 흩어져 살았는데, 6촌이 있었다. 6촌의 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맞아 '사로(斯盧)'의 왕으로 받들어 진한 12소국의 하나인 사로 6촌이 되고, 점차 신라 6부로 발전하였다. 이들이 나중에 그 공으로 각기의 성(
사로 6촌의 촌장들은 처음 표암봉(
사로 6촌
[편집]“ | 이보다 앞서 조선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6촌을 이루었으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 ” |
— 《삼국사기》 〈신라본기〉
|
알천 양산촌
[편집]알천[5] 양산촌의 남쪽은 고려시대의 담엄사이다. 고려시대의 파잠(
- 경주시 동방(
東方 ), 인왕(仁 旺), 구황(九 黃 ), 노동(路 東 ), 노서(路 西 ), 동부(東部 ), 성동(城東 ), 성건동(城 乾 洞 ) 일대.
돌산 고허촌
[편집]고려시대의 구량벌(
- 경주시 배동(
拜 洞 ), 내남면 덕천리, 울주군 두서(斗 西 ), 두동면(斗 東面 ) 일대.
취산 진지촌
[편집]진지(또는 빈지, 빈자, 영지)촌이다. 고려시대의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8]
- 경주시 진현동(
進 峴洞), 외동읍(外 東 邑) 일대.
무산 대수촌
[편집]무산[9] 대수촌[10]은 고려시대의 박곡촌(
- 경주시 현곡면(
見 谷 面 ) 일대.
금산 가리촌
[편집]고려시대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 고려시대의 상ㆍ하서지(
- 경주시 감포읍(
甘 浦 邑) 양남(陽南 ). 양북면(陽 北面 ) 일대.
명활산 고야촌
[편집]고려시대의 물이촌(勿伊
- 경주시 천북면(
川北 面 ) 화산(花山 ), 물천(勿川) 동산리(東山 里 ) 일대.
신라 6부
[편집]사로가 신라로 발전하면서 6촌은 6부로 자리잡았다.
- 양산촌은 급량부(及梁
部 , 또는 양부(梁 部 )), - 고허촌은 사량부(
沙 梁 部 , 또는 사탁부(沙 啄 部 )), - 진지촌은 본피부(
本 彼 部 ), - 대수촌은 점량부(
漸 梁 部 , 또는 모량[16](牟良, 牟梁)), - 가리촌은 한기부(
漢 歧部, 또는 한지부(漢 祗部)), - 고야촌은 습비부(習比
部 )로 자리잡아 신라의 6부로 발전했다.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은 왕경 내에 있었고,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은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왕경 내의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이 세력이 컸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초기에는 양산촌이 중추로 있다가 6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양산촌인 양부와 고허촌인 사량부와 진지촌인 본피부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18][19]
금석문에 나타나는 6부명과 그에 대한 대응은 이렇다. 1차사료인 금석문에서 훼(喙) 글자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량(
- 훼부<喙部> = 양부<
梁 部 > - 사훼부<
沙 喙部> = 사량부<沙 梁 部 > - 본피부<
本 彼 部 >, 본파훼<本 波 喙> = 본피부<本 彼 部 > - 잠훼부<岑喙
部 >, 모훼부<牟喙部 >, 모단벌훼<牟旦伐 喙> = 모량부<牟梁部 >, 점량부<漸 梁 部 > - 한지부<
漢 只 部 >, 한지벌부<漢 只 伐 部 > = 한기부<漢 祇部> - 사피부<斯彼
部 > = 습비부<習比部 >
신라 6성
[편집]서기 32년(유리왕 9) 6부의 후손들이 알평은 이씨(
왕성(
경주 6부
[편집]고려가 통일한 뒤인 940년(고려태조 23)에 '경주'(
각주
[편집]-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先 是 朝 鮮遺民 分 居 山谷 之 間 爲 六 村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다.) - ↑ 가 나 양산부를 양부라~:《삼국사기》(신라본기 제1권, 유리 이사금
條 )九 年 春 改 六 部 之 名 仍賜姓 楊山部 爲 梁 部 姓 李 高 墟部爲 沙 梁 部 姓 崔 大樹 部 爲 漸 梁 部 一 云 牟梁姓 孫 干 珍 部 爲本 彼 部 姓 鄭 加 利部 爲 漢 祇部 姓 裴明 活 部 爲 習比部 姓 薛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一 曰閼川楊 山村 二曰突山高墟村三 曰 觜山珍 支 村 或 云 干 珍 村 四 曰茂山 大樹 村 五 曰金山 加 ” “첫째는 알천양산촌이고, 둘째는 돌산고허촌, 셋째는 취산진지촌 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대수촌, 다섯째는 금산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 ↑ 당시 6부의 촌장들 중 소벌도리가 가장 연장자였던 것으로 전해온다.
- ↑ 다른 촌은 모두 산 밑에 있는데, 양산촌만 알천이라는 물가에 있어 살기도 가장 좋고 인구도 많아 중추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一曰閼川楊山村南今曇嚴寺長曰謁平初降于瓢嵓峯是 為 及梁部 李 氏 祖 奴 礼 王 九 年 置 名 及梁部 夲朝太 祖 天福 五年庚子改名中興部波潛東山彼上東村屬焉 ”(첫째는 알천양산촌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이다. 촌장을 알평이라 일컬으며 처음에 표암봉에 내려왔으니, 이가 곧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서기 32년)에 급량부라는 이름의 부(部 )를 두었는데 본조(本朝 )의 태조 천복(天福 ) 5년 경자년(庚 子 年 , 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 )라 하였다. 파잠(波 潛 )·동산(東山 )·피상(彼 上 )·동촌(東村 )이 여기에 속한다.) - ↑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二 曰 突山高 墟村長 曰蘇伐 都 利 初 降 于兄山 是 為 沙 梁 部 梁 讀云道 或 作 涿亦音 道 鄭 氏 祖 今 曰南山部 仇 良 伐 麻 等 烏 道北 迴徳等 南村 属 焉称 今 曰者太 祖 所 置 也下例 知 ”(둘째는 돌산고허촌이니 촌장을 소벌도리라 일컫으며,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사도부‘梁 ’을 ‘도’로 읽는다. 또는 ‘涿’이라 쓰지만 역시 음(音 )은 ‘도’이다.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 部 )라 일컫는데 구량벌 · 마등오 · 도북· 회덕 등 남촌(南村 )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라 일컫는다’고 하는 것은 태조가 설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四曰觜山珎支村一作賔之又賔子又氷之長 曰智伯 虎 初 降 于花山 是 爲 夲彼部 崔 氏 祖 今 曰通仙 部 柴 巴 等 東南 村 屬 焉”넷째는 취산진지촌빈지, 빈자 또는 영지라고도 한다이니, 촌장을 지백호라 일컫는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왔으니, 이는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라 일컫는데, 시파(柴 巴 )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 ↑ 무산이라는 명칭은 지금도 건천읍 일대 곳곳에 남아 있다.
- ↑ 건천읍 일대로 지금도 대수촌이라 부른다.
- ↑ 조선시대에 경주부일 때 서면이라 했고, 건천면으로 있다가 지금은 건천읍이 되었다.
- ↑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三曰茂山大樹村長曰俱一 作 仇 禮 馬 初 降 于伊山 一 作 皆 比山 是 為 漸 梁 一 作 涿部 又 牟梁部 孫 氏 之 祖 今 云 長 福部 朴谷 村 等 西村 屬 焉”(셋째는 무산대수촌이니 촌장을 구례마(俱禮馬 또는仇 禮 馬 )라 일컫는다. 처음에 이산(伊山 , 개비산(皆 比山 )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는 점량부(漸 梁 部 또는漸 涿部)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 일컫는데, 박곡촌 등 서촌(西村 )이 여기에 속한다.) - ↑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五曰金山加里村今 金剛山 栢 栗寺 之 北山 也長 曰祗沱一 作 只 他 初 降 于明活 山 是 爲 漢 歧部又 作 韓 歧部裴氏祖 今 云 加 徳 部 上下 西 知 乃兒等 東村 屬 焉”(다섯째는 금산가리촌지금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이니, 촌장을 기타지타라고도 한다라 일컫는다. 처음에 명활산으로 내려왔으니, 한기부(漢 歧部 또는韓 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라 일컫는데, 상하서지 · 내아 등 동촌(東村 )이 여기에 속한다.) - ↑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六 曰明 佸山 髙耶村 長 曰虎 珎初 降 于金剛山 是 爲 習比部 薛氏祖 今 臨川 部 勿伊村 仍仇旀村 闕谷一 作 葛谷 等 東北 村 屬 焉”(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촌장을 호진이라 일컫는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으니,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인데, 물이촌 ·잉구미촌 · 궐곡갈곡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 村 )이 여기에 속한다.) - ↑ 최치원의 출신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데, 《경상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대부분 《삼국사기》를 따라 사량부라 한다.
- ↑ 지금도 모량리가 있다.
- ↑ 조부 때 이후 출경하여 경산현 불지촌(
佛 地 村 ) 율곡(栗谷 )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 ↑ 대한민국 성씨 구성에서도 양산촌의 이씨, 고허촌의 최씨, 진지촌의 정씨가 5대성에 들어간다.
- ↑ 신라가 고대국가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권력 중심에서 차츰 밀려난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 사람들이 밀양, 성산, 경산 등지로 이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진지촌 사람들도 영일, 동래 등지로 산거하게 된다.
- ↑ 유리이사금(재위: 24년~57년) 때라고 하나 당시 성이 별 필요가 없던 시기이므로 실제로 사성을 받은 것은 훨씬 뒤일 것이다.
- ↑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삼국사기와 달리 고허촌에서 정씨가, 진지촌에서 최씨가 나왔다고 했다. 일연은 최치원도 본피부 사람이라 했는데, 이는 착오인 듯 하다.
- ↑ 대한민국 인구의 54%를 차지하는 대성인 김, 이, 박, 최, 정이 모두 신라 9성(
姓 ) 안에 들어있다.
같이 보기
[편집]알천양산촌 (閼 |
돌산고허촌 (突山 |
자산진지촌 (觜山 |
무산대수촌 ( |
금산가리촌 ( |
명활산고야촌 ( | |
---|---|---|---|---|---|---|
6부명 (6 |
급량부 及梁 |
사량부 |
본피부 |
점량부 |
한지부 |
습비부 習比 |
촌장 ( |
알평 謁平 |
소벌도리 |
지백호 |
구례마 俱禮 |
지타 祗陀 |
호진 |
강림지 ( |
표암봉 |
형산 |
화산 |
이산 |
명활산 |
금강산 |
후손 성씨 ( |
이씨 |
최씨 · 소씨 |
정씨 |
손씨 |
배씨 裵氏 |
설씨 薛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