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
황산벌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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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백제 정벌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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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신라 | 백제 | ||||||
지휘관 | |||||||
김유신 김흠순 품일 김천존 김반굴† 관창† 김법민 |
충상 상영 계백 † | ||||||
병력 | |||||||
50,000명 | 5,000명 | ||||||
피해 규모 | |||||||
불명 | 4,980명 |
황산벌 전투(
배경[편집]
642년(의자왕 2)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1]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2] 당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 간의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방면으로 진군하자, 의자왕은 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좌평 의직(
이렇게 의견이 나뉘어 싸우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
계백은 죽음을 각오한 군사 5천 명을 뽑아 출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
과정[편집]
8월 20일(음력 7월 9일) 신라의 5만 정예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곳에 진영을 두고 있었다. 당시 좌평 충상이 백제군을 지휘하였고, 달솔 상영과 달솔 계백은 충상의 부하 장수였다.[주 2]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지난 날 구천(
그러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
신라 정예군 진영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 다시 돌격하였고, 계백은 백제 병사들을 계속 죽인 관창의 목을 베었다. 화랑 관창의 죽음으로 신라군은 백제군보다 더욱 죽을 각오로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전멸하고 계백도 전사하였다.
결과[편집]
백제군은 모두 전멸하고, 좌평 충상, 달솔 상영을 포함한 20여 명은 신라에 항복하였다. 황산벌 전투가 있던 날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섬멸하고 신라 정예군과 합류하였다.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독군(
11월에 전공을 논하게 되었는데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항복한 충상, 상영 등을 예우해주는 차원에서 왕족을 제외한 가장 높은 신분인 6두품과 제7관등인 일길찬의 관직을 주고, 항복한 백제 귀족들에게도 그에 걸맞은 두품과 관직을 하사하였다.[10]
전사한 관창(
황산벌 전투를 다룬 작품[편집]
주해[편집]
각주[편집]
- ↑ 가 나 다 노중국, 황산벌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신라의 삼국통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가 나 《삼국유사》 권 제1 > 제1 기이(
紀 異 第 一 ) > 태종춘추공(太 宗 春秋 公 ) > 태종이 당의 소정방 등과 연합하여 백제로 진격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列傳 ) 제7 > 계백(階 伯 ) > 계백이 출정의 의지를 다지다(660년 6월(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김용만,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계백의 5000 결사대 황산벌서 '최후의 전투', 《소년한국일보》
-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列傳 ) 제7 > 계백(階 伯 ) > 황산 벌판에서 싸우다(660년 6월 (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新 羅 本紀 ) 제5 > 태종(太 宗 ) 무열왕(武 烈 王 ) > 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하다 (660년 7월09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列傳 ) 제7 > 관창(官 昌 ) > 계백이 관창을 돌려보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 나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新 羅 本紀 ) 제5 > 태종(太 宗 ) 무열왕(武 烈 王 ) >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660년 7월09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新 羅 本紀 ) 제5 > 태종(太 宗 ) 무열왕(武 烈 王 ) >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다 (660년 11월22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列傳 ) 제7 > 관창(官 昌 ) > 급찬으로 추증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외부 링크[편집]
- 《삼국사기》 권47 열전(
列傳 ) 제7(第 七 ) 계백(階 伯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 《삼국사기》 권47 열전(
列傳 ) 제7(第 七 ) 관창(官 昌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百濟 本紀 ) 제6(第 六 ) 의자왕(義 慈王) - 위키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新 羅 本紀 ) 제5(第 五 ) 태종(太 宗 ) 무열왕(武 烈 王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 《삼국유사》 권1 기이(
紀 異 ) 제1(第 一 ) 태종춘추공(太 宗 春秋 公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