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
김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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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 |
조선의 충청도 관찰사 | |
재임 | 1638년 ~ 1643년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80년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가평군 잠곡 |
사망일 | 1658년 9월(향년 79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회현방 회현동에서 병사 |
국적 | 조선 |
당파 | 서인 잔존 세력 |
부모 | 김흥우(부) |
배우자 | 파평 윤씨 |
자녀 | 김좌명(아들), 김우명(아들) |
친인척 | 김석주(손자) 명성왕후(손녀) 김석연(손자) |
학문 활동 | |
분야 | 성리학 |
김육(
인조 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1] 병조참판, 형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과 1645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추진하였고, 수레의 제조, 보급을 확산시켰으며, 시헌력(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화폐 이용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전사업을 건의, 민간에 주전(
자(
생애
[편집]생애 초기
[편집]출생과 가계
[편집]잠곡 김육은 기묘명현의 한사람인 김식의 후손으로, 판관 김비의 손자이자 강릉참봉 김흥우의 아들로 한성부 서부 마포면(
그는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학통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일부 계승하였다. 1594년(선조 27) 일찍이 조호익(曺好
유년 시절
[편집]이언적, 이황 등 다섯 선현(
청소년기에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는 한편 그는 임진왜란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그 뒤 김장생(
청년기
[편집]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
그러나 그 5현에 자신들의 스승인 조식이 빠진 것에 분개한 북인측에서 반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
이 사건으로 김육은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정거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광해군이 양보해 다음해에 오현이 문묘에 종사되고 그의 과거 응시 자격 박탈 조치가 취소되었다. 다른 관학생들은 모두 성균관에 복귀했으나 그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끝내 복귀를 거부했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
이후 그는 10여 년 동안 농촌에 파묻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정치 활동과 전후복구 사업
[편집]이괄의 난과 개혁안
[편집]관료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전생애를 국가 경제와 농촌 경제의 안정, 그리고 농민 생활의 향상에 바쳤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유일(
이어 음성진폐소를 올려 농촌 생활의 문제점을 개선할 것을 제의했다. 여기서 그는 토지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지 않은 과중한 세금 과세와 부과 과정의 부정을 세세히 나열하면서 부정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후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다시 음성현감으로 부임했는데, 음성현감을 마치고 다시 한성부로 올라올 때는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625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고, 동년 10월에 사간원정언에 임명됐다가 사헌부와 호패청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인조에게 전후 복구책이 우선임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26년 조정에서는 국방예산의 확충을 위해 각지에 호패어사라는 일종의 특임관을 파견할 계획이 논의되었다.[4] 고심 끝에 김육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그 일을 반대했다. 어사 파견은 무엇보다도 시간낭비며 실효성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 게다가 민간이 지급할 어사의 접대비도 적지 않아 가난한 백성들만 더욱 죽어날 것이었다.(<잠곡유고> 7권) 김육은 상소문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사직하였다.[4] 그 뒤 전후 복구와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의 상소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느냐 여부를 놓고 찬성하는 서인 유생 및 학자들과 반대하는 남인 유생과 학자들이 올린 상소들 때문에 묻혀서 빛을 보지 못하였다.
1627년(인조 5) 청(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 활동
[편집]전후복구와 시국 수습
[편집]정묘호란 직후 다시 국토가 황폐해지자 그는 양서의 사정을 논하는 〈논양서사의소〉(
1633년 9월 안변도호부사(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
전후 복구안과 외교 활동
[편집]36년 명나라에 파견될 성절사(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는 세금 감면과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였으며, 수차(
1643년 한성부 우윤·승정원도승지를 지냈다.[6] 동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고,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가자 보양관으로 소현세자를 수행하였으며 귀국하여 우부빈객이 되었으며, 겨울에는 원손보양관(
대동법 시행 발의
[편집]대동법은 이원익이나 조익 등의 건의로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험 실시되었으며 인조 원년인 1623년에는 강원도에 확대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이처럼 점차 확대 실시되어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그 실시 과정에서 양반 지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쳐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인조 때인 1636년 그는 대동법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당했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인조 16년인 1638년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양란으로 곤궁에 빠진 국가 재정과 농민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정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육의 이 주장은 조정에 파란을 몰고 왔다.
“ | 가난한 농민은 다 도망가서 그 본업( |
” |
김육은 대동법을 실시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농촌 경제의 붕괴, 곧 농민 생활의 파탄을 들었다. 따라서 과중한 세금 과세를 지양하고 과세 과정의 부정을 없앨 수 있는 근본 대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이다.
공납의 폐단 상소
[편집]김육은 중간에 방납업자들이 떼어가는 것, 관료들이 착복하는 것의 예를 들어 진상품 방납을 없애고 일원화된 세금 조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상주하였다. 거듭된 전란으로 민생은 피폐해졌는데 방납업자들이 토호나 관료들과 짜고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고, 착복한다며 이를 시정할 것을 상주하였다. 이어 그는 면세 내지는 감세를 주장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민생을 구제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세금 조달이 어려움을 상주하였다.
이후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수레 사용과 시헌력
[편집]1644년 성균관대사성으로 황해도와 평안도에 수레와 동전(
1646년 인조가 소현세자비 강씨(
1646년 청나라에 사은사가 파견될 때 사은부사(
중국의 명대에 와서 마테오 리치, 아담 샬과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의 천문학이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입된 서양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천문학이 아니라 주로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당시에 사용한 천문수치는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케플러가 편찬한 루돌프 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8] 이 서양 선교사들과 주로 서광계의 노력으로 중국에서는 ‘숭정역서(
대동법 시행
[편집]대동법 시행과 확산
[편집]1649년(효종 1년)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였다. 그해 5월 효종 즉위 초에 특별히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동년 9월 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다.
김육은 “왕자(
효종이 대동법의 시행을 약속함에 따라 우의정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조건부 출사에 산림은 그가 왕의 의지를 사적인 목적에 이용한다며 비난했고, 이어 사은 겸 동지사(
충청도에 대동법 확대 건의
[편집]김육은 효종에게 대동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이 법의 시행 여부는 오직 왕의 결단에 달려 있으니 만일 시행하지 못하겠으면 자신을 벌해달라는 강경한 소차를 올렸다. 한편 그가 명리를 취하는 사람이다, 일부 대동미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 등의 각종 유언비어들이 돌면서 그를 괴롭혔다. 소문이 계속되자 효종은 한때 그를 의심하였다.
김육의 반대 세력들은 이 글의 형식과 내용이 방자하다며 공격의 재료로 삼았지만 그 속마음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반대파들은 김육이 남송의 왕안석(
산당과 한당의 분열
[편집]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하자는 김육의 소차는 전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조정 여론이 찬반 양론으로 나뉘었던 것이다. 조정 내에서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좌의정 조익(
서인은 공신들의 파벌인 낙당과 김장생, 김집, 안방준 직계인 산당 외에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는 한당이라는 새로운 파벌이 나타나게 되었다. 낙당이 몰락할 때 한당의 일부 역시 함께 몰락했지만 그의 손녀가 세자빈(현종비)이 되면서 한당은 현종 때 가면 정파로서의 생명력은 지리멸렬해지지만 외척 세력으로 재편성되기에 이른다.
대동법 시행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다시피 했던 김육은 이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김육을 공격하는 데 선두에 선 인물은 이조판서 김집이었다. 김집이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송시열, 송준길 등 자신의 제자들을 출사시켰는데 이들은 김육을 공격하는 돌격대 역할을 하였다. 송시열은 김육을 비판했다.
“ | 우의정 김육이 (사실상) 전국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이조판서 김집의 시대인 것처럼 말하는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 ” |
김집, 송시열, 김상헌, 송준길, 김경여(
“ | 송준길, 송시열 등이 우의정 김육을 공격하는 것이 너무 과격합니다. 우상 또한 사대부인데 어쩌다 일이 이지경까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 ” |
라며 김육을 적극 변호하였다. 이 논쟁은 서인을 분당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동법 시행에 찬성한 김육을 중심으로 소수당인 한당과 이를 반대하는 김집, 송시열을 중심으로 다수당인 산당으로 분당되었던 것이다.
대동법 시행과 사직
[편집]“ | 왕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습니다.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이를 부른 탓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부역( 대동법은 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에 두루 행하지는 못하였어도 경기와 강원에서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습니다. 이를 양호( |
” |
그는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거듭 주청한 것이다. 여기에는 농촌 생활의 안정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 | 지금 만약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면 전라, 충청 양도의 전결( |
” |
라고 하여 대동법 시행이 국가 재정의 확충에도 도움이 됨을 역설했다. 이어 우의정을 사퇴하고 영중추부사로 전직하였다. 그 뒤 다시 영중추원부사로 진향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어 다녀왔다.
화폐 유통 확산
[편집]1650년(효종 1) 중국 사행길에 중국인들의 화폐 사용을 목격하고 귀국 후 조선 조정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는 한편, 아랫사람을 시켜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과 비단을 마련하여 중국 동전 15만문(
이후에도 청나라의 동전을 구입하여 조선에 유통시켜,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유통케 하여 정확한 액수에 거래하고, 물물교환으로 발생하는 마찰을 최소화하도록 하였다.
청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극심한 가운데, 그들에게 해마다 바치는 세폐와 북벌정책의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부담이 백성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인재와 재산피해 이외에 매년 가뭄 ·홍수 ·풍해 ·지진 등 각종 천재지변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위축된 백성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민심의 이반을 막는 것을 국왕과 자신의 과제로 보았다.
1651년(효종 2년)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대동법이 충청도에 시행되었다.
산림, 향촌 지주세력과의 갈등
[편집]1650년 대동법 실시 문제로 김집(
1651년(효종 2) 그의 적극적인 건의로 십전통보가 주조되었는데, 개성 지방의 민간인 상인을 영입하여 의해 사주(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려는 그의 주장은 지역 유지들의 반발과 산당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를 둘러싸고 확연히 갈라지는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하는 수령, 관료, 지역 유지들 등의 반발을 잠재워야 했고, 반발을 부추기는 장사꾼들의 계략에도 대응해야 했다. 대동법 실시에 반대한 김집(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
생애 후반
[편집]실록 간행과 금속활자
[편집]1651년 조선에서도 옆전을 주조할 것을 효종에게 건의하였다. 그해 1651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향사(
그는 인조와 효종에게 금속활자를 다시 제조할 것을 건의한다. 이후 구리로 금속활자를 제조하여 전란 후 중단되고 있던 서적 간행을 활발히 전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서적의 인쇄를 맡고 있던 교서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그새 주조해 놓았던 금속 활자가 다 없어지고 인력도 부족했다. 전란 후에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금속활자를 새로 주조하지 못하고 전란 전에 나온 책들을 본떠서 목활자를 어설프게 만들어 임시로 병영인 훈련도감에서 서적을 인쇄하고 있었다.
1651년 7월 효종이 그의 손녀딸 김씨를 세자빈으로 간택하는 문제를 논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녀딸이라 하여 간택문제를 논하는 자리에 불참하였다.[11]
효종 2년인 1651년에 실록청 총재관이 된 그는 금속활자를 재 주조하여 인조실록 50책의 간행과 <선조수정실록> 8책의 간행에 성공한다. 이후로 서적 간행에 힘써 개량된 목활자로 새로운 서적을 인쇄하는데 성공했고, 어쩔 수 없이 훈련도감 시설을 빌려 쓰던 것에서 벗어나 정식 주무 관청인 교서관의 기능도 되살려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밖에도 ≪황명기략 ≫(
1651년 12월 정태화(
은퇴와 영의정 복귀
[편집]1654년 영돈녕부사, 1655년(효종 6년)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6] 그러나 대동법의 시행에 반대하는 지역 유지들과 서인의 산당 파벌의 숱한 비판을 받았다. 1656년(효종 7) 다시 효종에게 금속화폐를 사용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다.
이 말을 듣고 효종이 대신들에게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
효종 8년 병조판서인 남인 허적(
영의정 재임과 사망
[편집]1658년(효종 9) 서필원(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다시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1658년 말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은 특별히 어의와 유명 의사를 보내 그를 진료하게 하였으나 잠곡은 그해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한다. 그는 임종에 임하여서도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 | 신의 병이 날로 더욱 깊어지기만 하니 실날 같은 목숨이 얼마나 버티다가 끊어질런지요? 아마도 다시는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할까 생각되므로 궁궐을 바라보며 비오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왕의 학문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마음을 간직하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 밖으로 치달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하께서 종전부터 학문을 강마하시면서 과연 이 도리를 잃지 않으셨습니까? 악정자 춘( 송 효종(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려 하는데 승호(陞戶)하는 일이 또 이때에 생겨 대신들이 다투어 간했지만 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후회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열 번 명령을 바꾼다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을 기르는 일은 오늘의 급선무인데, 찬선을 맡길 사람은 송시열과 송준길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공경스러운 예로 맞아 지성으로 대우하여 멀리하려는 마음이 없게 하소서.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 |
” |
그는 후손들에게도 활자 주조업을 계승할 것을 유지로 남겼고 이는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에게로 계승된다. 그의 부음 소식을 접한 효종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효종은 슬퍼하여 5일간 조회를 파하고 그를 애도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78세였다.
대동법의 확산
[편집]사후 10년 뒤인 1668년(현종 9) 현종의 특명으로 <잠곡집>을 간행하였다.
김육에서 그의 아들 김좌명으로 정책이 전수되는 것은 그들이 선조인 중종 때의 사림 명신 김식의 개혁 정신을 충실히 이었음을 뜻한다.
사후
[편집]사후 경기도 양주군 금촌리에 장사지냈다. 후에 문정(
그의 사후에도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 등은 가업인 인쇄술을 계승하였고, 김우명의 일부 후손은 강원도 춘성에 정착하여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 그 뒤 그의 대동법 등을 높이 평가한 영조 때에 이르러 그의 문집들이 다시 재간행되었다. 영조는 일찍이 1636년 명나라의 화가 호병이 그린 그의 초상화 겸 풍경화인 송하한유도에 헌시를 남기기도 했다.
“ | 잠곡 문정공 소상 어제찬( 윤건(綸巾)에 학창의( |
” |
경기도 양평군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
2000년 2월, '3월의 문화인물'로 지정되었다.[14]
가족 관계
[편집]- 할아버지 : 김비(
金 棐)- 아버지 : 김흥우(
金 興 宇) - 어머니 : 풍양조씨, 조희맹(
趙 希 孟 )의 딸- 부인 : 파평 윤씨 - 진사 윤급(
尹 汲)의 딸
- 부인 : 파평 윤씨 - 진사 윤급(
- 아버지 : 김흥우(
사상과 신념
[편집]재난 구호
[편집]당시의 내외 상황을 조선의 엄청난 위기로 파악하고 그 본질을 전쟁 방어를 소홀히하고 국력을 낭비한 위정자들의 과오 등이 빚어낸 민심이반(
기근과 질병, 부상과 각종 재난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고 치료할 목적에서 선조, 광해군 대에 편찬된 각종 의학 서적의 인쇄, 복사, 배포하였으며 《구황촬요(
경제활성화 정책
[편집]백성을 유족하게 하고 나아가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그는 화폐사용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엽전 발행을 장려하였는데, 당시 물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쌀과 베(
이 밖에도 농업의 장려와 작물 생산의 확산을 위해 수로 건설과 수차(
그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던 동시대의 재야 경제학자인 유형원(
평가와 비판
[편집]왕조실록에는 그의 인물평을 말하기를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말을 다하여 기휘(
경제 정책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충청도 관찰사 재직시 공물법(
그러나 왕조실록의 비판에 의하면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
저서
[편집]- 《잠곡필담(
潛 谷 筆談 )》 - 《유원총보(
類 苑 叢 寶 )》 - 《송도지(
松 都 誌 )》 - 《팔현전(
八 賢 傳 )》 - 《해동명신록(
海 東名 臣 錄 )》 - 《황명기략(
皇 明紀 略 )》 - 《종덕신편(
種 德 新編 )》
기타
[편집]호패어사 파견 반대 당시 그는 호패를 담당하는 호패청의 관리였다. 간쟁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관원이기도 했다.[4] 상소문에 밝힌 그의 견해는 사헌부의 관리로서 호패사무를 비판한 것이다. 이로 인해 호패청의 상관과 동료들 보기가 불편해진 김육은 스스로 사직했다.[4]
금속활자 주조
[편집]금속활자 주조에 대한 의욕과 서적 간행에 대한 정열은 그의 자손에까지 전해져 그가 일찍부터 전화(
그리고 그의 손자 김석주(
신념
[편집]-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선다'(
不 進 則 退 )
시
[편집]역사서 읽기가 싫어진다
알고 나면 언제나 눈물 흘리네
어진 이는 반드시 화를 입고
간신들은 도리어 출세한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격동의 조선후기를 지켜낸 힘 ‘대동법’
- ↑ 임진왜란 때 몽양가는 선조의 어가를 호위하지 않았다고 비판을 받은 것에 대해
- ↑ 가 나 다 김육[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가 나 다 라 [백승종의 역설] 피혐(避嫌) 한겨레 2009년 2월 6일자
- ↑ 임진왜란 직후 평민과 노비 중에는 고향을 등지고 도망가는 사례가 빈번하였으므로 족징과 오가작통으로 한 통리에 살던 주민들에게 대신 세금을 부과하였다.
- ↑ 가 나 다 라 “청풍김씨”. 2017년 5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월 8일에 확인함.
- ↑ 그러나 인조의 심중은 세자빈 강씨와 그 일족을 제거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 ↑ 가 나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104348/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3/02/03/2003020377023.html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임경순의 과학세상] 우리나라 전통 역법(
曆法 )] - ↑ 남인과의 제1차, 2차 예송논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서인의 내부 갈등은 격화되었다.
- ↑ 그가 평안도에 청나라, 명나라 옆전을 보급한 이래 옆전의 사용이 확산되었고, 현금이 부족하자 종이 문서로 된 어음 차용증도 출현하였다. 숙종 때의 상평통보 발행으로 이어졌다.
- ↑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1651 신묘 / 청 순치(
順治 ) 8년) 7월 27일(임인) 1번째기사 "김우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는 것에 대해 하문하다" - ↑ 효종실록 020 09/09/05(기해) /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돈녕부사 김육의 상소와 졸기"
- ↑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 ↑ ‘3월 문화인물’에 김육 선생 조선일보 2000.02.27
- ↑ 조선시대 태안반도에 물길공사 왜? 세계일보, 2008.2.13
참고 서적
[편집]- 노대환,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 (역사의 아침, 2007)
- 한정주,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다산초당, 2007)
- 박영규, 《한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 이성무, 《조선을 만든 사람들》 (청아, 2009)
-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잠곡전집》 (성균관대학교, 1975)
- 김두진, 〈이씨조선의 후기활자의 개주와 잠곡김육선생 3대의 공헌〉 《백낙준박사회갑기념논문집》 (연세대학교, 1955)
외부 링크
[편집]- 죽어서도 대동법을 외치다 : 김육
-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김육
- [백승종의 역설] 피혐(避嫌) 한겨레 2009년 2월 6일자
- 조선시대 태안반도에 물길공사 왜?
- 묵자의 공리주의 실천한 `김육(
金 堉)` 한국경제 2008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