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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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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백과 469건
  • 십자군 시대에 교황의 힘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교황권이 황제권 위에 있는 것은 태양이 달 위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로 강하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로마 교황령을 확대하기 위해 로마냐, 마르크 안코, 스폴레토 공령을 병합하는 일에 노력했다. [십자군 시대, 교황의 힘이 강대해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 혁신 운동을 계기로 하여 권위를 높인 교회와 교황은 우르반 2세 때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십자군 거병을 제창했고, 유럽의 팽창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십자군 시대에 교황의 힘은 강대해졌다. "교황권은 태양과 같은 것이고, 황제권은 달과 같은 것이다. 교황권이 황제권 위에 자리하는 것은 태양이 달 위에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연설하여 유럽에서의 교황권의 절정기를 이룩한 것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 로마 교황령을 확대하고 교황의 입장을 강화하다] 1198년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달리...

  •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을 위한 비용 충당을 명분으로 면죄부를 판매하여 푸거 가에 진 빚을 갚으려 했다. 이에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해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교회 부패를 방지하려 애쓰고 성서 중심주의를 철저화하며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얻는다’고 주장했다. [신앙의 시대, 로마 교황의 부패를 가져오다] 중세 유럽은 '신앙의 시대'라고 해서 기독교 만능의 시대였다. 그중에도 로마 교황은 온 세계 교회와 신도를 그 밑에 두었고, 그 권력은 황제를 파문하여 굴복시킬 정도로 막강하였다. 권력과 부귀가 커지면 반드시 부패와 타락을 가져오게 마련이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교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부패의 으뜸가는 것이 로마 교황에 의한 대량의 면죄부 판매였다. [레오 10세, 빚을 갚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 출신의 휴머니스트로서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를 보호한 인물이었으나, 교황의...

  •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점차 발전했다. 남부에서는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납치해 노예로 매매했고 북부는 노예 매매를 부정했다.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1863년 링컨은 약 300만 명 노예의 해방을 선언하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였다.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를 제외한 민주주의가 추구되다] 신대륙 미국에 새 국가가 형성되어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은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에 의해 부르주아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부르주아'란 원래 도시에 사는 시민을 일컬었으나, 공장을 소유하고 크게 장사하여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들은 돈의 위력으로 의회 의석을 차지하여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독립 선언'과 프랑스의 '인권 선언'에서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돈 많은 사람만이 의원이 되는 의회는 가난한...

  • 1632년에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증명할 수 있는 논문과 사실을 발표했지만 학자들과 로마 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이단 심문소에서 고문과 협박으로 지동설 폐기를 협박받아 지동설 포기를 수락했다. 360년 후에야 로마 교회의 이단 재판 잘못을 인정했다.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하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이 말은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말로 유명하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고, 그 때문에 종교 재판에 부쳐졌다. 그리고 로마 교황청 당국의 위협으로 천동설의 서약서에 서명하면서 이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한 논문이 발표된 1543년에서 90년이 지난 1632년에 갈릴레이가 그 지동설을 증명하는 책을 냈으나, 그때까지도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지동설을 지지한 학자들, 교회의 박해를 받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

  •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민주정치가 전성기를 이뤘다. 이때 대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등장해 민중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거기에서 새로운 진리를 찾으라고 했다. 그가 등장하고서야 비로소 자신과 자신의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철학에 기여하다] 소크라테스의 제일가는 제자는 플라톤(전 427~347)이다. 그는 아테네의 명문 출신으로,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처해진 후 오랜 동안을 여행하였다. 그 후 아테네로 돌아와 40살쯤에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의 학원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연구와 저술을 하였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세계 위에 변화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전 384~322)는 마케도니아에서 가까운 그리스의 폴리스 출신으로, 아카데미아에 입문하여 학문을 배웠다. 그는 플라톤의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3살 때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초빙을...

  •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베르사유 조약 내용은 패전국에게는 가혹했고, 전승국인 이탈리아도 불만을 가지게 했다. 이 상황에서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당이 세력을 뻗어 무솔리니가 수상이 되었고, 1926년 일당 독재 체제를 완성했다. [잠수함과 비행기, 제1차 세계 대전에 동원되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6월 28일에 프랑스의 베르사유에서 강화 회의가 열려 독일은 조약에 조인하였다. 돌이켜보면 제1차 세계 대전은 지난날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의 과학과 기술은 더욱 진보하였다. 이 진보된 기술이 전쟁에 동원되면서 전쟁의 상태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이다. 잠수함과 비행기가 처음 사용된 것은 이 전쟁에서였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간의 꿈을 이루게 한 비행기는 처음에 적의 진지를 정찰하는 데 사용되었다. 영국과 독일도 비행기를 보유하게 되면서, 처음에는 손수건을...

  • 러시아는 러일 전쟁에서 패한 후 심한 뒤탈을 앓았다. 당시 러시아는 헌법도 의회도 없었고 극소수의 귀족이 농민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굶주린 노동자들이 급료를 올려달라고 행진하자,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사격을 가하며 ‘거룩한 주일’을 ‘피의 일요일’로 만들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러시아와 싸우다] 19세기가 저물고 있을 때,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식민지 정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다른 나라들보다 일찍 서구화하여 한반도를 삼키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나라는 청이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청과 일본의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청일 전쟁(1894~1895)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자신이 붙은 일본은 점차 한반도에 그 세력을 뻗고 있는 러시아를 다음 상대로 지목하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식민지 정책을 추진해 온 러시아는...

  • 페르시아는 세력이 커져 폴리스를 지배하고 세를 징수했다. 그리스 인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걸고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켰고 아테네 군이 승리했다. 다음해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육군이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며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스의 바다, ‘액체의 길’이라 불리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 무대는 발칸 반도 남쪽 끝과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서해안 및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섬이 널려 있는 에게 해의 세계였다. '뭍은 갈라지게 하고 바다는 하나가 되게 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스의 육지는 산악지대여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이 기름진 넓은 평야가 없지만, 바다는 그리스인이 '액체의 길'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자유롭게 배를 부릴 수 있었다. [스파르타, 군국주의 체제를 펴 제일의 육군 국가가 되다] 그리스의 폴리스 가운데 아테네와 더불어 강력한 나라는 스파르타였다. 이는 도리아 족의 스파르타인이 선주민인 아게아인을...

  • 승전국 로마의 중소 농민층은 몰락하여 일자리를 찾아 수도 로마로 갔다. 사회 개혁을 위해 장군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가 제1회 3두정치를 결성,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체를 평정하고 이후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폼페이우스와의 접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승전국 로마, 중소 농민층이 몰락하다] 전쟁에 패배한 나라의 비참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승전국이라고 해서 좋은 일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연 로마는 카르타고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지배하에 두었고,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부가 흘러들어 왔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로 부를 차지하게 된 것은 로마인 중 극히 일부 유력자들뿐이었다. 반면 중소 농민층은 몰락하여 일자리를 찾아 수도 로마로 밀려들어 오게 되었다. 그들이 정부와 정치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토지와 일자리가 아니라 '빵과 서커스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서커스의 노예들, 반란을 일으키다] 로마의 서커스란 것은 경기장(콜로세움)에서...

  • 코페르니쿠스는 이전의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왜 행성이 천체상을 역행하는가 등의 의문에서 출발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지동설에 도달했다. 지동설 주장은 발표되고 440년이 지난 뒤에야 로마 가톨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마키아벨리의 등장, 정치계의 혁명을 일으키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주장해온 학설과 정반대가 되든가, 지금까지와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변화하는 경우 쓰는 말이다. 전환이란 말은 영어로 '레벌루션(revolution)'으로서, '혁명'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실로 혁명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상스는 그 자체가 역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든 문화 · 예술 · 종교 · 정치 · 과학 등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정치계의 경우 마키아벨리(1469~1527)가 등장하여 그의 《군주론》에서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이라는 것을...

  • 바스코 다 가마가 동쪽으로 항해한 것과 달리 마젤란은 서쪽으로 항해해 아시아로 가는 꿈을 실현했다.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은 그가 발견해 처음으로 통과한 곳이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죽었지만 그의 부하들이 출발지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유럽, 아시아와 교역할 수 있는 항로 개척에 나서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이래로 이슬람 세계와의 동방 교역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해 아시아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아시아의 물산, 특히 육류의 조미와 보존에 빠뜨릴 수 없는 향신료는 산지인 아시아에서는 헐값이지만 유럽에서는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팔렸다. 유럽인은 아시아와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새 항로의 개척에 나섰다. [마젤란, 서쪽으로 항해해 아시아로 가다] 대서양에 접해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기독교 세계의 확대와 동방의 부를 구할 목적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으로의 대항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 종교개혁의 파도는 프랑스에도 밀어닥쳤다. 프랑스의 구교와 신교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봉건 제후의 힘은 약해졌고 왕권은 강화되었다. 왕권신수설을 배우며 자란 루이 14세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왕이었으며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위그노 전쟁, 프랑스 왕권이 강화되다] 종교개혁의 파도는 프랑스에도 밀어닥쳤다. 프랑스의 구교와 신교 사이에 벌어진 위그노 전쟁은 30년 이상 계속되었고(1562~1598), 그 때문에 프랑스 봉건 제후의 힘은 약체화되었으며, 그것은 반대로 왕권 강화로 나타났다. 이 전쟁 중에 발루아 왕조는 단절되고, 신교인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앙리 4세가 부르봉 왕조를 열었다. 1610년, 앙리 4세가 가톨릭 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 아들 루이 13세가 아홉 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는 어렸기 때문에 왕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가 섭정이 되었다. 이 마리 드 메디치의 눈에 들게 된 것이 리슐리외였다. 이후 리슐리외는 죽을 때까지...

  •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의 영토 확장 경쟁은 치열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드레퓌스라는 한 인간을 늪으로 빠지게 한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제국주의적 풍조와 백인의 인종차별주의가 집약되어 나타난 사건이다. [유럽 열강,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전개하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후에 근대 사회가 발행하였다. 이 근대 사회의 이상은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도 가장 중요한 이상이다. 1880년 무렵을 전후하여 영국과 프랑스 및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열강은 일제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태평양 제도를 목표로 하여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국경을 넘어서 타국과 경쟁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팽창주의를 가리켜 '제국주의'라고 한다. [영국, 이집트 운하 권리를 차지하고 이집트를 정복하다] 인도를 정복하여 식민지 정책을 펴고 있던 영국은 수에즈 운하가 프랑스의 힘으로 완성하게 되자, 인도로 가는...

  • 중국에서는 진 왕조를 쓰러뜨리기 위해 각지에서 군사들이 일어났다. 무장 항우는 진승군에 합류했다가 진승이 죽자 진의 반대 세력을 모았는데 그때 군사를 이끌고 유방이 합세했다. 항우는 북쪽에서, 유방은 남쪽에서 진을 향해 진격해 셴양을 점령했다. [진 왕조를 쓰러뜨리기 위해 군사들이 일어나다] 중국에서는 진 왕조를 쓰러뜨리기 위해 각지에서 군사들이 일어났다. 진시황제가 죽은 후 중국 최초의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알려진 진승(ちんまさる)과 오광(ひろ)의 난이 일어났고, 이를 빌미로 하여 제후와 장군들도 반기를 들게 되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약 반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무장 항우(項羽こうう)와 농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각지에서 진군과 싸워 기원전 206년에 진을 멸하였다. 이후 항우와 유방은 천하의 주도권을 놓고 크게 싸우게 되었다. [항우와 유방, 각각 북쪽과 남쪽에서 셴양으로 진격하다] 항우는 초(すわえ)의 장군의 후손이었다. 진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초의 명장 항연(こうつばめ)은 그의...

  • [교과 연계표] || 구분 || 교과 || 단원 || | 중학교 |   | 문학의 본질과 속성 | | 고등학교 | 문학 |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 시의 짜임을 설명하는 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각각이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도 함께 설명해 주세요. [노래의 짜임새] 시는 어떤 문학 장르와 비교해 봐도 개성이 강한 장르입니다. 시에 사용되는 짜임새도 다양하지요.선경후정, 수미상관 등은 모두 시의 짜임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노랫말의 짜임새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노래 두 곡의 가사를 들여다볼까요?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어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밤엔 수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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