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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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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백과 469건
  • 조선 후기에는 판소리, 탈춤, 민요 등 서민 문화가 발달하는 흐름 속에서 그림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구수하고 재치 있게 민중의 생활을 표현한 풍속화가 유행하였고, 그들의 신앙과 소망을 담은 민화도 발달하였다. 풍속화에는 근엄한 표정의 양반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을뿐더러, 양반을 그림의 중심에 놓는 경우도 많지 않다. 오히려 민중이 그림의 주인공인 경우가 더 많다.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만의 표정으로 그림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이다. 풍속화가 가운데 김홍도는 원래 빼어난 궁궐 화가였지만, 풍속화에도 소질이 있어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못 외워 눈물을 찍어 내는 학동의 그림이나 가을걷이를 끝내고 타작하는 농부의 그림에는 당시 생활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편 민화는 1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소재를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그림들이다. 민화는 거칠 것 없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민중의 심성을 잘 드러내 준다....

  •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에는 일본인들이 세계 최대의 무덤이라고 자랑하는 닌토쿠 천황의 무덤이 있다. 옛 이름이 백제군 남백제촌인 이곳에서 우리는 지금도 백제역, 백제대교, 남백제소학교, 심지어 '백제' 성을 가진 일본인들의 문패를 만난다. 어떻게 된 것일까? 백제라는 이름이 백제가 멸망한 지 1,300년도 넘게 지난 지금 일본에서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은. 고대에 백제인들이 단순히 문화만 전파하였다면 일본 땅에서 이렇게 많은 백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사카의 닌토쿠 릉 등 일본 천황의 무덤 주변에는 백제계 이주민들의 무덤이 포진해 있으며, 백제인들의 공동묘지인 이치수카 고분군이 있다. 이곳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바로 아스카다. 아스카 문화로 잘 알려져 있는 이곳은 일본 고대 문화의 산실이자 일본인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곳이다. 현재 무덤 588기가 확인된 아스카의 대형 고분군인 니이자와 천총에서는 백제계 무덤 형식과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 세종 4년 정월 초하루의 일이다. 기상 관측을 맡은 서운관에서 이날 일식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보하였다. 오후가 되어 예정대로 일식이 진행되자, 왕과 신하들은 소복 차림으로 일식을 무사히 치르기 위한 예를 올렸다. 그런데 식이 끝난 뒤, 예보가 15분 늦었다는 이유로 담당 관리가 곤장으로 맞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하늘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엿볼 수 있다. 천문 현상은 하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하였다. 더욱이 하늘의 명령, 곧 천명을 받은 자가 통치자가 되고, 그것으로부터 땅의 질서가 시작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재상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서운관(관상감)의 최고 책임자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이렇게 공들여 천문 과학을 연구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은 우리 나름의 역법을 만들어 냈다. 그때까지 중국의 역법을 받아 쓰던 조선이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 《칠정산》을 만든 것이다. 《칠정산》은

  • 우리나라 도자기는 선사 시대 토기로부터 발달하였다. 삼국 시대를 거치면서 불을 다루는 솜씨가 좋아지고, 바탕흙을 달리 쓰면서 도기와 자기로 나누어졌다. 도기는 점토(진흙)로 만든 질그릇으로서 오늘날의 김장독 · 간장독처럼 옹기 · 항아리로 발달하였다. 흰 빛깔에 철분을 1~3% 머금은 고운 흙인 고령토를 재료로 한 자기는 고려청자, 조선백자로 나아갔다. 여기에 표면에 바르는 유약도 발달하여 한결 빛나고 윤이 나는 자기가 탄생하였다. 그래서 12세기 전반기에 순청자, 후반기에는 상감 청자 시대를 맞이하였다. 순청자는 청자 고유의 고운 빛깔과 다양한 모양새가 매력적인데, 특히 고려청자의 빛깔은 비색(翡色)이라 하여 중국의 비색(しょく)과 구별하여 부를 정도로 돋보인다. 중국 청자가 약간 진하고 어두운 빛깔이라면, 고려청자는 맑은 가을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투명하고 고운 빛깔이다. 상감 청자는 표면에 무늬를 새겨 넣는 상감 기법으로 만드는데, 이 기법은 고려가 처음으로...

  • [비단길의 관문, 둔황 막고굴] 비단길을 타고 들어와 중국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불교. 중생을 구하려는 바람은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둔황에 거대한 천불동의 석굴 사원을 짓는 것으로 이어졌다. 5호 16국 시대부터 원나라 때까지 중국인들은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석굴을 짓는 데 정열을 쏟았다. 석굴 안에는 벽화와 채색한 불상, 엄청난 문헌이 보관된 장경동도 있다. 미술, 종교, 풍습, 무용, 건축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자료를 담고 있는 이곳은 중국 그림의 보물 창고이다. [불교 예술의 한 떨기 꽃, 석굴암 본존불] 신라인이 그리던 세계는 불국, 곧 부처의 나라였다. 그들은 현실 세계를 이상적인 불국으로 만들고자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웠다. 석굴암은 경주시 토함산에 있는 석조 건축물로 인공 석굴 사원이며, 정식 명칭은 석불사이다. 본존불은 동해에 있는 대왕암을 향하고 있는데, 이곳은 감은사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가는 대종천의 발원지로 호국 불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 스키타이, 흉노, 돌궐, 위구르, 몽골은 분명히 유목민의 문화와 삶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목민의 출현은 언제나 정주민을 정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에너지는 초원을 떠나면 사라졌다. [초원의 전설 - 스키타이] 스키타이는 서아시아 초원에 최초로 유목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들은 신속한 기마 전술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200여 년 동안 남북으로 대치하였다. 스키타이는 독특한 동물 의장을 가진 청동기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동쪽으로 스키타이 시베리아형 문화를 전파시켰다. [흉노 제국]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말에 중국의 한과 팽팽히 맞섰다. 초기에는 흉노가 다소 우세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와 서기 1세기에 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뒤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4세기 초에 중국 땅으로 내려가 5호 16국 시대를 열었으며, 북흉노는 4세기 후반에 서쪽으로 진출하여 게르만족을 로마 제국으로 대거 이동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바로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였던 훈족이다....

  • [초기의 모스크] 이슬람교의 사원인 모스크는 돔으로 된 지붕과 귀퉁이의 첨탑(미나레트)이 특징이다. 모스크 내부는 단순하다. 메카의 방향을 알려 주는 미흐라브 외에는 별다른 구조물이 없으며, 바닥에는 카펫을 깔아 모든 신도가 꿇어앉아 예배를 본다. 외부는 아라베스크 무늬와 《쿠란》 구절로 화려하게 장식한 타일로 싸여 있다. 초기의 모스크는 단순하였으나 비잔티움 제국과 크리스트교 교회의 영향을 받아 후대로 갈수록 화려해졌다. ① 돔과 초승달 둥근 돔은 이슬람의 정신인 평화를 상징하며, 돔 꼭대기를 장식한 초승달은 헤지라의 밤에 떠있던 초승달을 의미한다. 모스크 벽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한다. ② 회랑과 샘 모스크 안에는 강한 햇살을 막기 위한 회랑과 예배 전에 몸을 씻을 수 있는 샘이 있다. ③ 미나레트 모스크의 일부인 첨탑.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시간을 알리는 곳이다. 모스크 직원이 미나레트에 올라가 예배를 권유하는 아잔의 시구를 외친다. “아침 예배는...

  • [메소포타미아의 문자] 인류가 라스코와 알타미라의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린 것은 수만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문자를 만들어 낸 것은 겨우 5,000년 전으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문자는 우루크 유적에서 나온 것인데, 곡식의 포대 수와 가축의 수가 적혀 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문자를 발명한 것이다. 아래에서 소를 의미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문자가 발전해 간 과정을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 문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수메르인, 아카드인, 바빌로니아인은 쐐기 문자로 신화와 수필, 일기, 편지, 법률 등 많은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수천 년 전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로제타석과 상형 문자] 4대 문명 유적에서 발견된 문자 가운데 한자로 발전된 갑골 문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늘날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 [르네상스] 14, 15세기에 지중해 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이탈리아의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현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에게는 ‘내세의 구원’과 함께 ‘현세의 행복’ 역시 가치 있는 일이었다. 부르주아지들은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예술을 후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런 가운데 15,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생명력 있고 균형 잡힌 인체의 아름다움을 조각과 그림에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서 출발하였다는 의미에서 ‘부활(르네상스)’이라고 부르는 동향이 출현한 것이다. 이후 막대한 재산을 가진 교황까지 예술을 지원하여 교회의 안팎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미면서, 르네상스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교회의 풍요와 사치가 커 갈수록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과 불만도 커졌다. 르네상스에 빠진 교회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피에타>. 고요함 속에도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맞은 마리아의...

  • [자금성]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 명 · 청 대에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てんし)’라고 부르던 24명의 황제가 살던 궁궐이다. ‘자금(むらさききん)’이라는 이름은 북두성(北斗星ほくとせい)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사는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1406년에 명 영락제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하였는데, 전국에서 건축 재료를 모아오는 데만도 12년이 걸렸고, 3년에 걸쳐 약 50만 명의 인부가 공을 들였다고 한다. 동서로 753미터, 남북으로 961미터 길이에 총면적이 72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또한 10미터 높이의 성곽과 깊이 6미터, 너비 52미터의 해자가 있어 성을 보호하고 있다. 자금성에는 8,704개의 방과 908채의 건물이 있다고 하니, 규모의 방대함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자금성은 현재 명 · 청 시대의 수십만 점의 유물을 간직한 고궁박물원(みや博物はくぶついん)으로 바뀌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건청문 암사자상 태화전의 태화문과 건청궁의 건청문 앞에는 사자 한 쌍이 양쪽에

  • [우주의 조화를 꿈꾼 사람들]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에서 온두라스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유럽인들의 침략 이전에 수준 높은 정착 농경 문화가 발전하였다.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옥수수 재배를 토대로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한 때부터 도시 문명이 등장하여 기원 전후부터 1,000여 년 동안 절정의 번영을 누렸다. 유카탄반도에서 엘살바도르에 이르는 남쪽 지역에서는 정연한 문자 체계를 만들고 종교적인 관심에서 고도의 천문학과 수학을 발전시켰던 마야 문명이, 북쪽에 위치한 멕시코 중부 고원에서는 대도시 테오티우아칸 등이 있었다. 이 문명들은 서로 교역하면서 예술 양식과 신화, 종교까지 주고받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유적지에서 공통으로 피라미드 모양의 신전을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비슷한 종교 의식이 행하여졌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아스테카 제국은 이러한 중앙아메리카 문명의 계승자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앞서 네 번의 제각기 다른 태양의 시대가...

  • [공자의 고향, 취푸] 중국 산둥성의 취푸는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고향으로, 공자를 기리는 공묘가 그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유가 사상은 진 시황제 때 철저하게 탄압받았으나 한의 학자 동중서의 주도로 형태나 내용이 새로워졌다. 그 덕택에 생전에는 유포되지 못하였던 공자의 가르침도 한 대 이후에는 역대 왕조의 비호를 받으며 국가의 통치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공자는 ‘지성문선왕(いたりひじり文宣ふみのぶおう)’이라 하여 성인으로 공경받았고, 공자의 자손들도 왕이나 제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취푸의 공묘는 점차 규모가 커져 현재 남북으로 1킬로미터에 달하며, 세계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공림 공림은 공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후손이 묻혀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가족 묘지이다. 공림에는 지난 2,400여 년간 보호받아 온 송백과 갖가지 고목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다. 이처럼 규모가 방대하고 기세가 웅대한 가족 묘지도 공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위는 공림 속...

  • [힌두 사원과 신] 힌두 사원은 신들이 땅에 내려와서 머무는 곳이다. 사원 건축에는 통일된 규칙이 있는데, 마치 신께 다가가는 의례처럼 건축된다. 사원 중앙의 신상은 신의 중요도에 따라 자리 잡고 있고, 신이 머무는 가장 성스러운 자리는 사원 꼭대기이다. 이것은 우주 중앙에 있는 메루산을 나타낸다. 힌두교에는 비슈누와 시바 아래 셀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와 예수도 있어 힌두교의 포용성과 다양성을 짐작케 한다. [힌두교도들은 왜 소를 숭배할까?] 원래 힌두교 경전에는 소를 숭배하는 구절이 없을 뿐더러, 힌두교도들이 특별히 소를 보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소가 힌두교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는 차츰 인구가 늘고 농경이 확대되면서 쟁기를 끌 소의 중요성이 커진 데서 비롯되었다. 특히 암소는 농사에 필요한 황소와 고기보다도 영양가가 높은 우유를 생산한다. 게다가 소똥은 땔감이 부족한 때에 요긴하게 쓰인다. 그러다가 소의 오줌과 똥에 다섯 가지의 신성한...

  • [타지마할 묘당]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재위 1627~1656)은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이 죽자, 그녀를 기리기 위하여 무덤을 짓기 시작하였다. ‘왕궁의 꽃’이란 뜻의 이름처럼 아름다웠던 왕비를 잃은 슬픔에, 샤 자한은 세금을 한꺼번에 50퍼센트나 올려 가면서 22년 동안 무덤을 짓는 데 열중하였다. 평소에도 멋진 건물 짓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인도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페르시아, 멀리 유럽의 솜씨 있는 장인들을 불러모아 공사에 투입하였다. 주재료로 사용한 백색의 대리석 외에도 화려한 보석들이 동원되었다. 튀르크 지역의 연옥과 티베트의 수정, 미얀마 북부의 옥, 아프가니스탄과 이집트의 진주,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등이 수입되어 타지마할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타지마할은 한쪽 벽의 길이가 56미터, 중앙에 있는 큰 돔의 높이만도 5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건물이지만, 공중에 떠 있는 듯 아스라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칭찬이

  • 이 글은 지평의 남미 답사 팀 일원인 아버지를 따라 함께 답사를 마친 수원 천천중학교 서주형의 글이다. 2학년 겨울 방학이 끝난 뒤 학교에 제출한 체험 학습 보고서의 내용 그대로이며, 글속의 사진은 거의 주형이가 직접 찍은 것이다. 1~2일째 페루의 수도 리마.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23시간 40분, 그러니까 꼬박 하루 동안 비행해서 도착하게 된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도시이다. 3년 전 남부 유럽을 여행할 때 이렇게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비행한 경험이 있는지라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행기라고는 제주도 갈 때 한 번 타 보셨던 어머니는 많이 힘드신 것 같았다. 리마의 시각으로 새벽 1시, 녹초가 된 일행들은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모두 뻗어버렸다. 눕자마자 일어난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란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로비에 모여 인원 파악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고고학 박물관부터 시작해서, 센트로 대통령궁, 산마르틴 광장을 지나 한국 음식점 ‘노다지’(첫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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